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겠지
하지만 오늘의 해를 보내고 싶지 않아서
2020시즌, 우연히 야구를 처음 보았을 때는 눈으로 등에 박혀있는 그들의 이름이라든가 방송 자막으로 뜨는 낯선 선수들 이름을 쫓느라 바빴다. 내가 유일하게 알던 선수는 이승엽(2017시즌 삼성 라이온즈에서 은퇴)이었다. 그래서 이승엽을 찾아봤지만 정작 그는 없었다. 뭐 맨날 경기 나오는 게 아닐 수도 있지. 하지만 그는 다음 경기에도 나오지 않았다. 어제 본 선수들의 이름은 여전히 거의 못 들어본 이름이라 다시 한 번 얼굴과 맞춰가며 외우기 바빴다. 이후 내가 정말로 야구에 빠져들었을 때에야 깨달았다. 그는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가 아니라 SBS sports 해설위원으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뭐야 저 아저씨 왜 저기 있어? 당연히 경기 뛰고 있는 거 아니었어? 물론 아니었다. 이미 3년 전에 은퇴경기까지 한 아저씨를 어쩌다 보니 300경기 가까운 시간이 지났는데도 현역으로 만든 점은 이 자리에서 심심한 사과 메시지를 드릴까 싶다. 하지만 모 캐스터의 말처럼, 어쨌거나 대구에 살던 나는 '왕조'를 지나온 탓에 '이승엽'의 시대를 살았으니까. 그가 영원히 뛰겠지, 같은 허무맹랑한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고나 할까.
야구를 꾸준히 보고 나서 알게 된 것은 예전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지나가버렸던 스포츠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그 선수들. 그러니까 야구를 잘 몰라도 야구선수하면 이 정도는 알지! 하던 사람들이 더는 그라운드 위에 서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적잖이 충격이었다. 프로야구를 구성하는 그런 유명인들이 정작 내가 보는 야구에는 (선수로서)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의 전성기를 보고 자라서 이제야 그 아저씨들 야구하는 거 보자 했더니 웬걸 이제 21세기 애들도 야구를 하고 있다. 내가 어렸을 때는 분명히 완전 아저씨들이 뛰는 스포츠가 야구였는데 딱 봐도 어린 티가 나는 선수들이 뛰는 걸 보자니 기분이 묘했다. 와, 내가 볼 때는 진짜 아저씨들이 하고 아저씨들이 보는 스포츠였는데 분명. 2020시즌 이전엔 야구의 ㅇ도 모르던 터라 정규시즌을 열심히 보지는 않았기에 가장 오래된 기억을 꼽자면 베이징 올림픽을 떠올린다. 물론, 그때도 이승엽이었던 듯하다.
베이징 올림픽 당시 분노했던 강민호. 13년 후에도 이렇게나 회자될 줄은 본인도 몰랐을 것 같다
그런 베이징마저 벌써 13년 전의 이야기. 베이징 올림픽에 출전했던 막내급 포수 강민호가 13년 뒤 도쿄 올림픽에서는 신인 투수들을 이끌 베테랑 포수가 되어 팀을 이끈다. 당연히 국제대회의 멤버들도 많이 바뀌었다. 특히나 2020 도쿄 올림픽 국가대표팀은 올림픽을 처음 경험하는 어린 투수들의 비율이 높다. 같은 팀에서 합을 자주 맞춰본 원태인(삼성 라이온즈)도 15살의 차이가 있고, 대표팀에서 가장 어린 이의리(KIA 타이거즈), 김진욱(롯데 자이언츠)과는 17살 차이가 난다. 그렇게 시간이 가고, 얼굴들은 바뀐다. 시곗바늘을 뒤로 돌려도 시간은 바뀌지 않듯이 우리가 알던 얼굴들을 붙잡는다고 돌아오지는 않는다.
언제까지고 야구를 할 것 같은 사람들의 등번호가 다른 선수들의 이름으로 어색하게 자리잡는 것(물론 어색함은 그다지 길진 않다), 그라운드에 늘 그 포지션으로 있을 것 같은 선수의 얼굴이 점점 안 보이는 일, 은퇴를 고민해야 하지 않겠냐는 주제에 주어로 언급되는 그 선수의 이름.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묘한 일들은 보다 자주 일어나고, 어느새 내가 야구를 처음 봤을 적 있던 이들이 슬슬 없어진다.
어제의 해가 지나야 오늘의 해가 뜰 수 있듯, 오늘의 해가 지나야 내일의 해가 뜨는 법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오늘의 해를 보내고 싶지 않다. 어제의 해를 아무것도 모른 채 보냈다면, 오늘의 해는 적어도 일몰까지는 제대로 보고 말 테다. 그러면 내일의 해는 일출부터 바라보며 그들의 일몰을 어렴풋이 예상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누가 보면 구질구질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미련이란 으레 남기 마련이지 않나. 어제는 겨우 일몰만 봤고, 오늘은 벌써 노을이 진다. 하지만 그것을 허투루 보내고 싶진 않다. 적어도 나는 그 노을을 기억하기 위해 다양한 일을 할 것이다. 몇 번이고 보러 가고, 사진도 찍고 기록도 하고. 비록 짧은 시간일지언정 그 노을을 기억할 수 있는 방법은 총동원할 것이다. 내일의 해를 뜨는 걸 어떻게 막겠나. 대신 오늘의 해는 오늘에 영원히 남길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남기는 것도 물론, 그들 또한 오늘을 일몰까지 화려하게 장식할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