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들이 바라봐야될 투자관점 1편
기독교인들에게 ‘주식투자’는 오랫동안 불편한 주제였다. 교회 내에서 땀흘려 일하는 노동의 가치는 신성시되지만, 자본을 통해 수익을 얻는 행위는 종종 불로소득(不勞所得)이나 투기, 혹은 탐욕의 결과물로 치부되곤 했다. 그러나 과연 성경이 말하는 경제관이 자본주의의 시스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일까? 우리는 이제 맹목적인 거부감에서 벗어나,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투자의 본질을 냉철하게 직시해야 한다. 투자는 단순히 돈을 불리는 기술이 아니라, 건강한 기업을 육성하고 사회를 윤택하게 하는 ‘자본의 청지기’ 역할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를 이해하려면 먼저 ‘사업’의 본질을 꿰뚫어야 한다. 사업은 안락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불확실한 미래에 리스크를 걸고 도전하는 행위다. 창업자는 실패 시 모든 짐을 짊어져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감수한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이러한 도전 정신은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지 않고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태도와 맞닿아 있다.
리스크를 딛고 일어선 기업이 창출하는 가치는 실로 막대하다. 하나의 기업이 바로 서면 수많은 일자리가 생겨나고, 직원과 그 가족들의 생계가 해결된다. 기업이 낸 수익은 세금과 기부를 통해 약자를 돕는 재원이 된다. 즉, 건강한 기업 활동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마19:19)는 계명을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가장 이는 효율적으로 실천하는 방식 중 하나다. 따라서 이윤 추구 자체를 악으로 규정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가진 ‘창조적 생산성’을 간과한 단편적인 시각이다.
그렇다면 투자는 무엇인가? 투자는 이러한 기업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연료’를 공급하는 행위다. 비록 나의 자본이 거대 기업에 비하면 미미할지라도, 주식을 매수한다는 것은 그 기업의 지분을 소유하고 경영의 리스크를 함께 짊어지겠다는 ‘동업 선언’이다.
여기서 우리는 ‘투자’와 ‘투기’를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단기간에 100배, 1000배의 수익을 좇아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것은 탐욕에 기반한 투기다. 이는 명백히 성경적 가치와 반대된다. 그러나 투자는 기업의 가치를 알아보고, 그 기업이 사회에 기여하는 방향에 동의하며, 나의 잉여자금을 위탁하여 성장의 과실을 공유하는 것이다. 내가 직접 사업체를 운영할 능력이 부족하더라도, 뛰어난 경영 능력을 가진 이에게 자본을 대줌으로써, 간접적으로 사회적 부가가치 창출에 기여하는 것. 이것이 바로 투자의 철학이다. 이 철학은 성경적이라 할 수 있다.
막스 베버가 통찰했듯, 자본주의 정신의 뿌리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닿아 있다. 청교도들은 금욕과 절제를 미덕으로 삼았다. 그들은 열심히 일했고(근면), 검소하게 생활했으며(절제), 그렇게 남은 잉여 자금을 허랑방탕하게 쓰지 않고 다시 생산적인 곳에 투입했다.(투자)
기독교인의 투자는 이러한 금욕주의적 삶의 태도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나의 사치와 향락을 위해 돈을 굴리는 것이 아니라, 절제된 삶을 통해 마련된 잉여 자금이 사장되지 않고 다시 세상으로 흘러가 기업을 살리고 경제를 돌게 만드는 것. 이 선순환의 고리가 바로 투자의 핵심이다. 투자자들이 건강한 안목으로 자본을 공급할 때 기업은 혁신하고, 일자리는 늘어나며, 국가는 부강해진다. 이는 정부의 인위적인 정책이나 보조금 살포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사회를 윤택하게 만든다. 이런 모델이 기독교인들이 추구해야될 방식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사용법을 올바르게 해석하지 못한다면, 자본주의는 악하게 사용되고 만다. 시스템이 아무리 좋아도 구성원이 이를 악용하거나 게으르게 대처한다면 국가는 빈곤해질 것이다. 국민들이 가난해지면 결국 정부가 무언가를 해주기만을 바라게 되고, 정부는 이러한 국민의 의존적인 태도를 악용하여 포퓰리즘으로 권력을 유지하려 들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대한민국 발전의 초석이 되었던 새마을 운동의 핵심 가치 중 하나인 ‘자조(自助)’의 정신을 상기해야 한다. 자조란 ‘자기의 발전을 위하여 스스로 애쓴다’는 의미로, 외부의 도움 없이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을 말한다.
국가를 탓하기 전에 내가 먼저 바로 서야 한다. 건강한 투자를 통해 경제적 자립을 이룬 ‘자조하는 국민’들이 많아질 때, 국가는 함부로 국민을 휘두를 수 없으며 오히려 국민이 원하는 바를 따를 수밖에 없게 된다.
결국 문제는 ‘돈’ 자체가 아니라 돈을 대하는 ‘태도’다.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투자는 리스크를 분담하고 가치를 창출하는 고귀한 경제 행위가 될 수 있다. 기독교인은 세상의 흐름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탁월한 분별력을 가지고 옥석을 가려내어 그곳에 자본이라는 생기를 불어넣어야 한다.
내가 리스크를 감당하고, 기업의 가치를 분별하며, 절제된 삶으로 모은 잉여 자금을 사회에 환원하는 투자의 과정. 이 모든 과정이 ‘나’라는 개인을 부강하게 할 뿐만 아니라, 내 후손들에게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물려주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정부의 정책에 일희일비하며 왈가왈부하는 것보다, 내 스스로가 건강한 자본가로 서서 사회를 윤택하게 이끄는 것이 훨씬 건강하고 생산적인 일이다. 이제 우리는 투자를 단순한 이재(理財) 수단이 아니라, 세상을 지키는 ‘자조적 청지기’의 사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달란트가 무엇인지 확인하고, 잘 활용해야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