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마티스. 따뜻한 햇살 아래 가을 풍경이 떠오르는 포근한 그림책
『베르가못 아주머니의 집』을 받아 든 순간, 세계적인 거장 앙리 마티스의 작품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예술에 문외한이긴 하나 다행히도 마티스는 알고 있었고 그의 화풍도 야수주의라는 사실도 어렴풋이 스쳐 지나갔다. 소더비 경매에서 수백만 달러에 낙찰된 '아네모네 꽃병'이란 작품을 보고 그림책을 살펴보니 프랑스 화풍의 독특한 필치를 덤으로 느낄 수 있었다. 첫인상이 독특하게 다가온 그림책이기에 흥미롭게 페이지를 이리저리 넘겨보니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감정은 바로 '따뜻하다'였다.
주인공 소년은 베르가못 아주머니네 집에 놀러 와 그 집에 있는 고양이들과 시간을 함께 보낸다. 노란 은행잎과 바알 간 단풍잎이 가을 정취를 물씬 느끼도록 길가를 수놓고 있으며 날씨마저도 화창하기 그지없다. 가곡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가 떠오르기도 하고 명곡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을 흥얼거리기에도 손색이 없다. 베르가못 아주머니 마당에는 오래된 사과나무가 있어 그 주변에서 숨바꼭질을 하기도 하고 아주머니를 도와 사과를 따서 잼을 만들어 빵에 발라 먹기도 한다. 소년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주머니 집에는 어떤 연유로 머물러 있는지 중요하지 않다. 그저 이 순간이 더없이 평화롭기만 하다.
고양이 살구가 숨바꼭질을 하자고 하더니 '못 찾겠다 꾀꼬리'를 해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숨바꼭질을 하자고 아빠에게 요청해 놓고 마트로 손잡고 웃으며 도망가는 우리 아들, 딸이 떠오르게 한다. 불과 몇 주전 일이라 그런지 낄낄 거리면서 뛰어가는 남매의 모습이 눈에 선해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그 사이 할머니는 우리를 위한 간식을 만드시는지 맛있는 음식 냄새가 은근하게 식탁 주변을 거쳐 마당까지 넘어온다. 음식의 맛, 향뿐만 아니라 정성까지도 거실 주변에 차분하고 따뜻한 배색으로 나타나 마치 할머니의 마음이 눈으로 전해지는 듯한 기분이다.
간식을 먹은 뒤 할머니와 박하 잎도 함께 따고 고양이들과 재미있게 놀다 보니 어느새 밖이 칠흑 같은 어둠으로 바뀌었다. 할머니께서 혹시라도 고양이와 소년이 추워할까 봐 벽난로에 군불을 때셨고 집안은 금세 훈훈한 열기가 감돈다. 그 열기 속 고소하게 전해지는 푹 익은 감자 냄새. 소년은 아마 내일 아침까지 배가 부르지 않을 것 같다. 어느 나라나 할머니의 사랑은 방법은 달라도 마음만은 한결같은 모양이다.
이윽고 들려오는 인기척. 아빠가 소년을 데리러 오신 모양이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부자의 모습 뒤로 커다란 나무가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다. 혹시라도 가는 길이 너무 어두울까 주홍빛 어스름이 부자의 길 앞을 환히 비추고 있으며 지나가는 길목에 자리한 이웃들의 집도 모두 환하게 불이 켜져 있다. 이야기의 등장인물 간의 커다란 갈등이나 에피소드가 자리하진 않는다. 그러나 읽는 이에게 마음 한편에 잠시 꺼져있던 스위치를 켜 힐링과 여유, 평온과 고즈넉함이 물씬 자리하게 만드는 고마운 그림책임에는 틀림없다.
책을 덮고 지난 주말, 아들과 딸을 데리고 우리 아파트 주변 놀이터에 다녀왔던 날을 떠올려 본다. 일요일 오전 9시 놀이터는 그야말로 한산하기 그지없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어 동네 친구도 없지만 아이들은 아빠와 밖에 나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즐거워했다. 아이들과 숨바꼭질을 하다 말고 나도 모르게 감탄하며 카메라에 담을 수밖에 없는 가을 풍경을 보며 나도 덩달아 즐거웠다. 『베르가못 아주머니의 집』등장인물도 그러했을 것이다. 특별하지 않은 일상이지만 그렇기에 차분하게 맞이할 수 있는 오늘. 엄청 크고 값비싼 선물 없이도 유유히 행복할 수 있는 오늘이 우리 모두에게 있었다.
일상에 파묻혀 잊고 살았던 가을 풍경의 소중함.
그보다 더 잊고 살면 안 되는 일상의 소중함.
잔잔하게 돌이켜볼 수 있어 좋았던 그림책이다.
가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