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기록 4
게스트하우스 ‘소설여행’.
이 이름을 보고 문득 떠올랐다.
좋아하는 미국 작가이자 여행가 폴 서루의 한 마디.
“소설을 쓰는 것과 가장 비슷한 일은 낯선 풍경 속을 여행하는 것이다.”
일을 마치고 지나는 길에 훌쩍 당도한 군산에 '소설여행'이라는 멋들어진 이름을 단 숙소라니. 주인장은 혹시 폴 서루의 책을 읽었던 게 아닐까.
숙소가 마음에 쏙 들어 하루 더 연장해 달라 했다. 그랬더니 주인장이 반색한다. 이렇게 오래 묵는 분은 별로 없는데. 그 말에 내가 더 놀랐다. 고작 사흘인데요? 여기 오는 손님들은 대개 하루나 길어야 이틀이거든요.
여행하는 사람은 두 부류가 있다.
관광객(tourist)과 여행자(traveler)다.
관광객은 이곳저곳을 분주하게 방문해 명승지를 구경하고 사진을 찍는다. 더 볼 게 없으면 지체없이 떠난다. 반면에 여행자는 미적거리며 어디도 가지 않고 사람들 이웃들 사이에 끼어 이것저것 물어보며 여기저기를 기웃댄다.
그렇다면 나는 여행자이지 관광객이 아니다.
게스트하우스 투숙객들을 훓아보니 주변에 혼자 온 여행자들은 혼자라는 그 사실이 아직 어색한 듯 보였다. 혼밥도 편해 보이지는 않았다. 주어진 시간을 혼자서 어떻게 보내야할까 적이 갈피를 잡지 못하는 듯한 사람도 있었다. 혼자가 어색한 사람들은 남들이 날 어떻게 볼까 괜히 이상해 보이지는 않을까 신경을 쓰다가도 일부러 태연한 척 아닌 척 씩씩한 척을 한다.
말동무도 벗도 없이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으로 난생 처음 혼자 떠난 여행길은 누구에게나 낯설다. 적응하기가 어려운 건 당연하다. 처음은 누구나 그렇다. 예외 없다. 어색하고 불안하며 조바심이 난다. 하지만 해보지 않은 걸 시도하는 것 자체가 용기다. 모험이다. 그리고 한 번 그 세계에 발을 들여놓으면 해방감이 자유가 선물처럼 찾아온다. 중단 없이 포기 하지 않고 끝까지 가보려 하는 자에게는.
큰 배낭을 메고 군산 거리를 돌아다닐 때는 사람들이 날더러 관광객이냐고 물었다. 배낭도 걸리적거려 검은 비닐봉지에 핸드폰 등 간단한 소지품을 담아들고 군산 산책에 나섰다. 그랬더니 이번엔 횡단보도에서 공원에서 길에서 사람들이 내게 길을 묻는다. 어떤 외양이냐에 따라 사람들 반응이 달라진다. 재밌다.
왕복 4차선 해망로에서 관광객인 듯한 여자 한명이 나를 붙잡고 묻기 전까지는 깨닫지 못했다. 저기요. 여기는 왜 신호등이 없어요? 어떻게 건너요? 어쩔 줄 몰라 한다. 아하, 여기 말고 저 위로 가면 거기에는 신호등이 있어요. 아니면 뭐, 그냥 눈치껏 건너가면 되겠죠? 우리 둘이 서서 대화를 나누는 사이 누가봐도 여기 사는 군산 주민 할머니 한 분이 설렁설렁 길을 건넌다. 무단횡단이라. 에라 모르겠다 내가 그 뒤를 따르자 여자는 종종걸음치며 내 뒤를 쫓아온다.
동남아나 중국에서 신호등 없는 찻길, 자동차 자전거 오토바이 툭툭에 사람들로 엉키고 뒤섞인 도로를 숱하게 겪었던 터라 내 경우엔 대수롭지 않은 일이지만. 사람마다 예상 밖의 상황에 처할 때 자기 경험치대로 또 반응이 다르다. 이 또한 재밌다.
어느 나라 어느 도시를 가던 낯설음이 익숙함과 편안함이 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최소 사흘은 머물러야 적어도 일주일은 있어야 사물이 공간이 사람들의 삶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하루 이틀이었지만 사흘 나흘 늘어나고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이 된다. 그렇게 언제부터인가 나는 잠시 구경하고 떠나는 관광객이 아니라 머무는 여행자가 되었다. 이제는 어느 도시 어느 나라를 가든 며칠만 지나면 그 공간에 스며들어간다. 낯선 곳에서 이방인으로 관찰하는 도시의 공기. 그리고 향수.
외형이 언어가 환경이 달라도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똑같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더 이상 낯설음이 두렵지 않다. 반면 사람 사는 건 같아도 관습과 문화에 따라 미묘한 차이가 있다는 것 또한 느끼게 된다. 같고도 다른 것을 발견하는 것 그리고 그 사이를 부유하는 이방인. 경계에 머물지만 거기 살지 않고 떠돌지만 살아 있는 자가 여행자다.
인생이라는 항로에서 가치 있는 목표란 부모의 품을 떠나 세상으로 들어설 수 있는 단단하고 성숙한 자아를 키우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경험하고 느끼고 배우고 깨닫고 구체화하는 본질로서만 가치가 있다. 자신 스스로 본질을 구체화하지 못한다면 그 삶은 의미가 없다. 같은 의미로 구체화된 본질로서 체득한 경험이 아니라면 그 여행 또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사진 몇 장으로 남은 박제된 관광일 뿐이다.
삶 자체가 곧 여정이라는 것을 깨우친다면, 우리가 이미 이 세계의 무한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낀다면, 욕망도 태도도 사물과 사람을 즉 삶을 바라보는 관점도 바뀐다. 그리고 여행은 바로 수수께끼 같은 인생을 배우는데 있어 최상의 방법이다. 특히 혼자 가는 여행이 그러하다.
“최상의 여행은 혼자 하는 여행이다. 보고 조사하고 평가하기 위해 여행자는 홀로여야 하고 또 홀가분해야 한다. 여행자에게 타인은 방해가 될 수 있다. 타인은 자신의 두서없는 인상을 여행자에게 밀어넣기 때문이다. 말동무가 될 만한 사람들은 여행자의 견해에 방해가 될 것이다. 반면에 지루한 사람들은 “이것 봐, 비가 내리네” 또는 “여기 나무가 굉장히 많은데” 같은 허튼 소리로 침묵을 망치고 주의를 흩뜨릴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곁에 있으면 사물을 분명히 보고 똑바로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 중요한 것은 다소 진부하더라도 자신의 감정에 비추어 특별하고 흥미로운 비전을 포착하기 위한 고독의 투명함이다.“
- 폴 서루 <동방의 별로 가는 유령 기차>
나는 내가 잘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날마다 오고 가는 익숙한 공간에서 거리감을 느끼는 경우가 더 많다. 그보다 나를 아는 이가 한 명도 없는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 사이에 홀로 존재하는 것이 더 편안할 때가 많다.
낯선 곳에서 익명으로 떠도는 것, 낯선 이들 사이에서 침묵으로 소일하는 것, 아무 것도 아닌 자로서 흥미로운 곳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여행이다.
이같은 여행은 너무도 유혹적이라 한 번 빠져들면 여지없이 중독되고 만다.
아마도 그래서 내가 나홀로 여행을 좋아하는 지도 모른다.
함께 하는 여행이 주는 충만감과는 달리 혼자 가는 여행은 관찰자로서의 홀로-있음에 머무르는 충실함을 준다.
여기서는 아무도 나를 모른다.
그 사실이 무언가 알싸한 해방감, 달콤한 자유를 준다.
스스로 원해서 선택한 고독은 외로움도 소외도 아니라 폴 서루의 표현대로 어쩌면 '슬픈 기쁨'이므로.
“때때로 여행은 자학이며 슬픈 기쁨이다. 낯설고 그림처럼 뚜렷하게 섬뜩한 장소에 도착하는 것은 여행자가 누리는 기쁨 중의 하나이다.”
-폴 서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