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기록5
다섯 시만 되면 사위가 벌써 어둑어둑해진다. 머지않아 긴긴 밤 겨울밤이 시작된다.
나뭇잎이 소슬한 바람에 휘날리는 가을에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낯선 간이역을 향해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옹송그리는 마음이 깊숙한 동굴 속에서 또아리를 틀고 마는 긴 밤, 동면의 겨울밤에는 자꾸만 떠나고 싶다. 배낭 하나 메고 훌쩍 집을 나서고 싶다. 나는 밤에 굴복하고 싶지 않다. 비행기에 올라 해가 지지 않는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가고 싶다. 어느 낯선 땅, 말이 통하지 않는 거리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싶다.
그럴 때마다 할인 항공권 사이트를 이리저리 뒤져 사지도 않을 비행기표를 살펴보며, 한번도 가지 않은, 외국의 어느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비행기 좌석을 예약한다. 그리고 부르릉~ 지면을 힘차게 구르고 하늘로 도약하는 비행기를 떠올리며, 비행기 창문 아래로 손바닥보다 더 작게 사라져가는 세상을 상상하며, 가벼운 흥분에 몸을 떤다. 미지의 세계 새로운 세계로 떠날때 느끼는 취한 듯한 흥분과 긴장 상태. 그 정신적 몽환 상태 .......
첫 여행이 주는 설레임. '첫' 이라는 단어가 환기시키는 두 글자 - 청춘.
스물 다섯 살이었던가. 첫 여행을 떠났다. 여행에 대한 로망에 사로잡혔다. 한 번 물꼬가 터지자 멈출 수가 없었다. 그 뒤로 계속 비행기에 올랐다. 여행은 바로 청춘이었다. 서른에도 서른 아홉에도 마흔에도 길 위에서는 내가 '청춘'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샌가 나는 돌이킬 수 없이 나이를 먹어 버렸다. 이제 청춘 여행이라는 말은 낯간지럽다. 배낭 하나를 메고 지구 끝까지 가보리라 용기백배했던 젊은 날 그 여행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다. 마구 방종했던, 권태롭고 또 불안했던 그 시절은 이미 지나가 버린지 오래다. 헤어진 옛사랑의 그림자처럼 추억이 되어버린 청춘. 그리고 나는 이제 막다른 끝을 향해 무한대로 질주하는 청춘이 아니라 천천히 걸어가는 연륜의 여행자가 되었다.
지금의 내가 보는 세상이 젊은 날 바라보던 세상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시절의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지금의 나는 단지 추억할 뿐. 이제 그 때와 똑같이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 무모했으며 아름다웠던 그 열정은 이제 내 이름이 아닐 것이다. 그럴 것이다.
이제 나는 젊은 날의 나와는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숨가쁘게 사랑하고 미친듯이 헤맸던 과거의 나와 안녕을 고하고 이제 나는 적당히 느릿느릿 적당히 쉬엄쉬엄 가고 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떠남' 이 두 글자에는 여전히 가슴이 설렌다. 이 두 마디에 내 마음이 저만치 뛰어간다. 청춘.
창 밖을 보니 해가 지고 있다. 아아, 눈이 내렸으면 좋겠다. 타락하고 오염된 것들을 일거에 쓸어버렸으면 좋겠다. 아직 지불하지 않은 미래를 좀 더 유예시켜주었으면 좋겠다. 감수성이 메마른 사람들로 가득찬 이 도시에 옛날 옛적 아주 먼, 먼 나라의 동화를 조용 조용 이야기해주면 좋겠다.
ㅡ내게 여행은 언제나 첫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