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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재희 Hong Jaehee Nov 15. 2024

여행은 비움이자 배움이다

여행자의 기록 6






길(여행)은 마음이 휘청거릴 때 떠나는 것이 좋다. 다리가 휘청거릴 때가 아니라.


여행도 다 때가 있다. 나이먹어서 은퇴해서 여유가 생기면 돈이 넉넉하면 떠나겠다는 사람들 많이 봤다.정작 몸은 따라주지 않고 마음은 허랑하고 음식은 입에 맞지 않아 김치 타령만 하다가 며칠 지나면 스멀스멀 온몸을 휘감는 향수병에 시달리는 한국인 관광객들을. 이들은 결국 '무엇을 느꼈냐'보다는 '무엇을 봤냐', '어디를 가봤다'가 더 중요한 사람들이다.






터키 이스탄불에서 어느 한국 중년 부부를 길에서 우연히 만났다. 육십 대 즈음일까. 아마도 은퇴 후 터키 단체 관광을 온 듯한 부부였다. (해외에서 한국인들은 옷차림으로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똑같이 짜맞춘 듯이 젊은이들은 커플티, 등산복 입은 중노년은 십중팔구 한국인이다.)  등산복을 깔맞춤한 전형적인 한국인 부부. 이스티크랄 거리에서 화장실을 찾아서 길을 헤매던 부부.



사내는 뭔가 잔뜩 성이 나 보였고 여자는 말이 통하지 않아 애를 먹고 있었다. 영어가 안 되는 그들을 도와주고 싶었다. 그들 대신 옆 식당에 들어가 화장실이 급한 데 쓸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이층 화장실을 쓸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런데 여자가 급한 줄 알았더니 소변이 마려운 건 남편이었다. 여자의 뒤에서 몇 걸음 떨어져 서 있던, 잔뜩 찌푸린 표정을 한 중년 사내가 여자와 나를 휙 지나치더니 부리나케 위층으로 뛰어올라갔다. 내가 남자의 뒤꽁무니를 쳐다보고 있자 민망했던 듯 여자는 내게 연신 고맙다고 과하게 인사를 했다.



그런데 잠시 후 볼 일을 보고 내려온 남자는 식당 주인에게도 나에게도 인사는커녕 휭 하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어안이 벙벙했다. 난처해진 나는 식당주인을 쳐다봤다. 그러자 밖으로 나간 남자 쪽을 쓰윽 한 번 보더니 날보고 어깨를 으쓱하더니 빙긋 웃는 식당 주인. 그러거니 말거니 나는 모르쇠로 일관하며 밖에서 딴청을 부리고 있는 그 남자. 예의 없는 남편을 대신,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남자의 아내가 나와 터키인 식당주인에게 연신 머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빨리 나오지 얺고 뭐해! 가자. 갑시다. 남자는 제 아내에게 뭣하냐고 재촉하며 성화를 부렸다.



순간 욕이 나올 뻔 했다. 저기요! 아저씨. 고맙다는  말 몰라요?  미소 지을 줄 몰라요? 라고 한 마디 쏘아주고 싶었지만 남편 눈치를 보랴 사람들 신경 쓰랴 종종 대는 여자를 보고 마음을 접었다. 아주머니. 못난 남편 체면 살리고 알량한 사내 자존심, 허울좋은 기를 살려주느라 용 쓰시는군요. 한심하여라. 타인에게 미소 지을 줄도 인사도 할 줄 모르는 무례한 저 한국 중년 개저씨. 늘 아내의 대접만 받고 살았나. 에티켓이고 뭐고 없는 예의실종. 무표정에  화난 얼굴. 친절은 시궁창에 처박은 듯. 저럴거면 여행은 왜 다니는 걸까.



이 부부를 갈라타 타워에서 또 마주쳤다. 팔짱을 꼭 끼고 바짝 붙어서 거리를 연신 두리번거리며 걷고 있었다. 여전히 웃음끼 하나 없는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를 보니 그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잔뜩 긴장한 꼴이 둘이 떨어지면 죽는 모양이었다. 길거리에서 골목에서 벽에 기대어 서서 느긋하게 담배를 피거나 카페에서 커피 한 잔에 하릴없이 시간을 즐기고 있는 한가로운 이스탄불 사람들에 비하니 씁쓸해졌다. 저럴거면 도대체 여행은 왜 다니는 걸까. 안쓰럽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하고 촌스럽기도 하고. 안타까웠다.



돈이 많으면 뭐하나. 다 늙어서 마음도 닫히고 몸도 힘든 때 여행을 떠나면 뭐하나. 마음 속에 겁과 의심과 눈치를 달고 길을 떠나면 뭐하나. 여행은 사랑과 연애와 같다.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알아서 되는 것이 아니다. 연습이 필요하다. 돈만 있으면 시간만 있으면 되는 것도 아니다. 연습하고 노력하고 계속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처음이라면 한 살이라도 더 어릴 때 더 젊을 때 떠나는 것이 좋다.  놀아본 사람이 늙어서도 잘 논다. 젊어서 길 떠나본 사람은 나이먹고도 떠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반면 여행을 떠나본 적이 없는 사람은 - 예외적인 몇몇 사람들을 빼놓고는 - 대개 여행자라기보다 관광객으로 길을 떠난다. 관광객으로 길을 떠나면, 나이먹고 늙어서 집 떠나 길 위에 서면, 익숙하지 않은 모든 것이 스트레스가 된다. 그래서 여행이 힘겨워지고 버거워진다. 나이 먹고 돈으로 여행을 떠난 사람이라면 그런데 길을 떠난 게 처음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돈 많이 벌고 나서야 일 그만두고 은퇴 후 늙어서 떠나면 이미 늦다.



다양성 포용력 개방성.


여행자가 갖추어야할 기본 덕목이다.


나를 내려놓고 비워야 배운다.


언제 어디서나 미소와 인사.

선입견, 편견, 고정관념을 내려놓는 열린 마음.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과 격없이 배우려는 자세.



환영받고 환대받는 여행자의 디폴트 기본값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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