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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재희 Hong Jaehee Nov 21. 2024

비행기를 놓치다

여행자의 기록 12




월요일 아침 10시 30분 에어 아시아 비행기를 타고 같은날 오후 4시경 말레이지아 KL 국제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 내 환승호텔에 체크 인, 1박 투숙을 하고 다음날 새벽 가뿐하게 일어나 체크아웃, 예정대로라면 나는 다음날인 화요일 아침 7시 20분에 서울로 가는 환승편을 타고 오후 2시 즈음에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지금쯤 이미 집에 도착해서 편히 쉬고 있어야 했지만.....





아뿔싸! 비행기를 놓쳤다. 이른 조식을 먹으며 노트북 열고 글 쓰느라 열중해 있다가 그만.... 카페 직원이 다가와 비행편이 몇 시냐고 물을 때까지도. 내가 비행기를 타야한다는 사실조차 모두 홀라당~~~ 완벽하게 기억 삭제.


- 제 비행편은 오전 10시 30분인데요.


속으로 생각하길 오호, 뭘 그런걸 다 물으시나 참, 내가 모를까봐서. 미소까지 지어보이며 느긋하게 말을 뱉어놓고 나서 잠시 후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잠깐, 10시 30분은 어제 아침 멜번에서 출발할 때 시간 아니였니? 주위를 둘러보니 식당 안에는 나 혼자 밖에 없었고. 오잉? 잠시 멍해졌다. 그제야 화들짝 정신이 현실세계로 돌아왔다. 아하! 나 비행기 타야지?  KL 발 서울행 비행기는 오전 7시 20분인데......으아악! 이 바보 멍청아! 실컷 욕을 해봤지만 어쩌겠니. 날 태우지 못하고 이미 서울로 떠나버린 야속한 비행기여.


가방을 메고 트렁크를 끌고 어제 왔던 길을 고스란히 반복한다. 환승 통로, 안내소, 세관을 통과하여 공항 도착장을 빠져나와 다시 출국하는 승객이 되어 에어 아시아 데스크로. 공항에서 별별 경험을 했지만 요런 황당한 시츄에이션은 또 처음이다. 고객데스크에는 나처럼 비행기 놓친 한무리 바보들이 툴툴거리며 줄지어 있다. 음.....괜히 반가운 것이 왠지 모르게 동지애가 생겨나는구나. 세관에서 고객센터에서 발권할 때 무슨 일로 비행편을 놓쳤냐고 물어보길래 질문 하나당 거짓말 한 번씩. 화장실에서 설사를 하다가 그만, 노숙하다 늦잠을 자다가 그만, 알람 소리를 못들어 그만.  '카페에서 느긋하게 모닝커피 한 잔 마시며 글 쓰다가 비행기 탄다는 걸 새까맣게 잊었어요'라고 할 순 없자나!


서울가는 편도 표를 카드로 긁었다. 공돈이 날라가는 걸 눈 부릅뜨고 지켜보자니 속이 우라지게 쓰렸지만 어쩌랴. 3월 토정비결에 쓸데없는 지출이 많다 낭비 조심하라더니 아 놔, 이런 거였어. 게다가 자정까지 자리가 없다고 만석이라고. 도대체 누가 서울에 그렇게 많이들 쳐 가는 거야! 속으로 씩씩대다가 하아....... 결국 하루 24시간 하고도 9시간. 도합 33시간을 공항에서 보내게 되었다는 이야기올시다. 공항에서 공항으로 월요일에서 수요일로. 피곤에 파김치 피로에 푸욱 절여지고 있단 소리.




말이 씨가 된다더니. 평소 공항을 좋아한다 사랑한다 알랭 드 보통처럼 나도 공항에서 일주일 살 수 있다고 큰소리치고 까불대다가 결국 이런 일을 겪는구만. 그런데 왜 자꾸만 비실비실 웃기지. 소원대로 공항에서 하루를 살게 되긴 했는데 이런 식일 줄은. 자꾸 자꾸 웃음만 나온다.


하루가 주어졌으니 공항 밖으로 나가 아예 KL 시내로 가볼까 생각도 했지만, 깨끗이 접었다. 과거에 이미 한 달 배낭여행으로 두 발로 곳곳을 돌아다닌 말레이지아. 다시 한 번 보고 싶다는 그리운 마음이 안 든 건 아니었으나..... 짐이 배낭 하나면 아마도, 하지만 배낭 메고 걸리적대는 트렁크까지 들고 푹푹 찌는 도심을 돌아다니는 건 영 내키지 않았다. 편도를 다시 끊어 이미 경비를 초과했기에 더더욱.  



세수하고 이빨 닦고 공항 출국장 식당가를 꼼꼼히 돌고 면세점도 보고 여기저기 기웃 기도실 기웃, 오가는 사람들 구경. 공항 바깥 구경. 기기 충전하러 플러그 있는 벽마다 사람들이 딱 붙어 있기 때문에 자리가 나면 잽싸게 엉덩이 붙이고 있어야 한다.


텅빈 통로에 공주옷 입은 꼬마가 까악까악 비명 지르며 춤춘다. 아주 신났다. 좋겠다. 넌 고민도 걱정도 돈 날릴 이유도 없겠구나. 아드레날린을 한 사발 도파민을 통째로 들이킨 것 같은 아이를 바라보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배낭 내려놓고 스맛폰 충전하는 사이 바닥에 누워 골아 떨어진 아재 한 명 단체 관광객이 우르르 몰려오니까 황급히 일어나 짐 챙겨 가지고 사라진다. 인도네시아에서 오신 단체 관광객 한 무리에 둘러싸여 공항 와이파이 사용법을 물어보는 영어 안 되는 아주머니와 인니어 안 되는 내가 대화를 나누며 그렇게 시간이 흘러간다. 그거 아는가. 쿠알라 룸푸르 공항 출국장 2층 통로에는 참새들도 왔다갔다 한다는 사실.




지금까지 비행기를 탄 긴 역사 중에 비행기를 놓친 게 이걸로 다섯번째.


첫번째는 인천공항에서 뉴욕 가는 비행기를 놓치는 바람에 부랴부랴 모아놓은 아시아나 마일리지로 편도행을 탔다.


두 번째는 북경 찍고 라오스 가는 비행편이었는데 또 놓쳐서 벌금 물고 표값 환급 받았다.


세번째는 아시아나발 독일 프랑크푸르트행이었는데 집에서 만료된 여권 들고가는 바람에 못 탔다. 타야할 비행기가 코앞에 있는데 출국을 면전에서 거부당한 그 생생하고 짜릿한 기억. 영화제 측에서 비행기표를 끊어줬길래 망정이지. 생돈 날릴 뻔했다. 다행히 다음날 이른 시간에 좌석이 있어서 표 변경. 영화 상영 하루 전에 간신히 맞춰 도착하는 바람에 주최측 가슴 졸이고 서독제 위원장에게 십 년 짜리 또라이짓이라며 두고두고 '바보' '헛똑똑이'라고 구박당했던 경험.


네번째는 두바이 거쳐 터키행. 두바이에서 하루 사막 자동차 트레킹 투어를 신청해놓았다. 자정 12시 반을 다음 날로 착각하여 집에서 딩가딩가 하고 있는데 항공사에서 다급한 전화가 왔더랬다.


-승객분 지금 공항 어디십니까? 탑승 곧 완료합니다. 문 닫습니다. 빨리 오세요.

-네엣? 저, 집인데요. 비행기 내일 아네요?

-그 내일이 지금 새벽 12시 30분을 말하는 겁니다.


아아아, 그렇게 난 비행기도 놓치고...흑흑.....평생 버킷리스트 하나였던 사막 투어도 날렸다. 공중에 흩뿌려진 돈다발이여~~~돈도 없는 빈털털이 주제에 참, 알차게 사고 친다.


쿠알라 룸푸르 공항 차디찬 바닥에 앉아 지나간 기억을 곱씹으면서. 그래도 저가항공 에어 아시아라 다행이야, 싸서. 흐흐흐. 아니면 어쩔 뻔했어. 애써 스스로 위안삼으며 3월에 너덜너덜 빵구난 은행 잔고와 두둥 빚천지 카드 결제일을 어떻게 감당할까 궁리중.....


잠시 생각해 봤는데 내 무의식 속에 초미세먼지로 최악인 서울에 가기 싫었던 건 아니었을까나~~~~~이번 사건으로 얻은 한가지 수확은 뻥 좀 보태 이제 눈감고도 쿠알라 룸푸르 공항 지도를 그릴 정도는 된다는 거. 음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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