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기록 13
떠나야 보인다.
떠나야 내가 떠나온 세상이 보인다.
떠나야 밖에서 안이 보인다.
떠나야 내가 우리가 보인다.
그런데 떠나도 못 보는 사람 안 보는 사람들도 있다.
외국에 여행을 갈 때마다 한국인을 만나면 알 수 있는 한국인들의 특징. 국내에서도 외국인을 만나면 똑같기는 하다.
외국인을 만나면 십중팔구 한국인은 먼저 이렇게 묻는다.
"Where are you from?"
자신이 만난 그 개인보다는 그의 나라가 더 궁금한 사람들. 상대의 국적을 확인한 후에 우리는 그의 나라가 우리나라보다 잘 사는 나라인지 못 사는 나라인지 우리보다 선진국인지 후진국인지를 또 가늠한다. 말하자면 사람을 GNP와 GDP로 구분짓는 거다.
그 다음에는 "how old are you?" 라고 묻는다.
나이로 서열을 세워 위계를 잡겠다는 서열주의 위계주의 발상. 일단 나이가 많고 적음으로 상대와 나의 위치를 가늠하고는 나이에 따라 태도를 결정한다. 한국인들은 이 두 가지를 우선적으로 확인한 후에 국적에 따라 나이가 많고 적음에 따라 성별에 따라 상대를 대하는 태도가 백팔십도 달라진다.
필리핀 보라카이 한인 식당에서 목격한 일.
사장 부부가 식당에서 일하는 필리핀 종업원에게 마치 애 다루듯 우리말로 반말을 찍찍 하는 걸 봤다. 나야 한국인이니 그들이 상대를 어떤 식으로 대하는지 말투와 태도만 봐도 알지 않는가.
내가 다 부끄러웠다.
세부에서 대학에 다니던 그녀는 방학 기간에 고향에 돌아와 알바를 하고 있다 했다.
한국말을 못하는 그녀지만 그녀는 사장이 자기를 하대하는 걸 알고 있었다.
난 멋쩍어 웃어주었다. 그래도 너 괜찮니?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노 프라블럼' 한국어로 '괜찮다'고 방긋 웃었다.
그녀는 말했다.
여기 한국인들은 무조건 빨리빨리 밖에 몰라. 돈도 많은데 항상 화난 찌푸린 얼굴을 하고 있어. 그런데 넌 웃을 줄 아는구나. 넌 좀 다른 거 같아.
그 말이 슬펐다.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한식을 먹을까 해서 어느 식당에 들어갔다.
은퇴해 프놈펜에 정착한 육십 대로 보이는 한국인 부부가 운영하는 식당이었다.
남편인 듯한 남자는 테이블에 앉아 꼼짝도 않고 신문을 보고 있었다.
그의 부인만 손님 맞으라 요리 주문 넣으랴 계산하랴 식당 안으로 테이블로 계산대로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한가로운 은퇴 생활을 즐기시는지 남자는 턱짓으로 재떨이를 종업원에게 가져오라고 시킨 후 그렇게 사내 행세를 하면서 자리를 지켰다.
엉덩이를 본드로 붙여놓은 것 같았다.
어찌나 꼴불견이던지 밥맛이 다 떨어져서 주문도 하지도 않은 채 그대로 나와버렸다.
라오스 비엔티엔. 새해 정월 초하루.
떡국 생각이 간절해 한인 게스트하우스에 딸린 한식당에 갔다.
한식당을 운영하는 중년 남자는 한국에서 조폭이라도 하다가 도망온 듯한 양아치였다.
자신이 귀신도 때려잡는 해병대 출신임을 자랑스럽게 거들먹거리더니 비슷한 패거리로 보이는 한국 사내들과 옆 테이블에 자리를 펴고 화투를 치기 시작했다.
이제 갓 스물이 되었을 거 같은 남자의 라오스 아내가 웃으며 음식을 내왔다.
남자는 제 아내 엉덩이를 툭 치며 지나가는 말로 내게 이렇게 말했다.
라오스 여자들은 어리고 예쁘긴 해도 게을러 터졌어. 이것들은 내가 자리만 비웠다하면 일을 안해. 믿을 수가 없어.
상스러운 놈.
얼굴이 화끈거렸다. 떡국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새해 첫날 기분을 잡쳤다.
이런 상황을 맞닥뜨릴 때마다 이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난 속이 뜨끔해진다. 행여 나도 저러고 있는 건 아닐까. 자꾸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동남아 여기저기 길거리에서 마주친 한국인들.
술집에서 카페에서 한국식당에서 터미널에서 카오산로드에서 마주친 한국인들.
나이 물어보고 애인 있냐를 물어보고 꼬치꼬치 캐묻고 오빠행세를 하는 남자들이 꼴보기 싫어서,
매번 묻지도 않은 TMI 질문으로 오지랖을 떨고, 불쑥 선을 넘어오고 아는 체 하는 것 말고는 모르는 타인과 현지인들과 대화할 줄 모르는 꼰대들이 싫어서,
한국인을 만나면 멀리 돌아서 갔다.
게스트 하우스는 한인이 하는 곳은 발 길도 디딘 적이 없다.
오직 현지인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서 먹고 잤다.
타국에서 만난 한국인들.
거리를 두지 않고 오로지 호구조사와 관계 맺기에 열중하는 이들이 매우 피곤했다.
타지에 나와서도 한국인끼리 패거리를 이루고 오로지 한국인 찾아 삼만리하는 그들을 보며 궁금했다.
그럴거면 굳이 왜 외국에 나와서 낯선 거리를 방황하는 것인가.
누구는 영어가 딸려서 어쩔 수 없다 했다.
대부분이 영어 핑계를 댔다.
거짓말이다.
영어 한 마디 못해도 손짓발짓 해가며 미소로 화답하며 동남아 일주를 떠난 스물 두 살 여자를 만난 적이 있다.
외국에 처음 나와봐서 그런단다.
변명이다.
회화책을 들고 떠듬거리며 처음으로 혼자 배낭여행을 떠난 멋진 배낭족들을 알고 있다.
군사정부가 주도한 국가주의와 천민자본주의 외에는 배운 게 없는 한국인들이
천박하기 짝이 없는 시장 만능주의를 선진국의 지표로 여기는 한국인들이
세상에는 돈으로 바꿀 수 없는 가치가 있다고는 한 번도 생각도 하지 않는 한국인들이
사람을 남녀노소 지위나이 막론하고 개인 대 개인으로 평등하게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한국인들이
세상 모든 사람이 죄다 자기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살고 있는 줄 착각하는 한국인들이
시간이 흘렀으니 이제 좀 달라졌으려나.
대한민국이라는 이 좁은 세상을 벗어나면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데.
세상은 정말 넓고 너무도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환경 문화 사회에서 살고 있는데.
우물 밖 세상은 하늘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지구는 둥근데.
근대인이 되지 못한 어떤 한국인들은 우물 밖을 나가서도 우물 안 개구리가 보는 하늘만 본다.
그러나 길 위에서 나이 인종 국적 불문 정말 멋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행운도 있었다.
그들을 통해 느낀 점도 많고 배운 것도 많았다.
길 위에서 만난 이들은 모두 내게 시절인연이자 한편으로 인생의 스승이었다.
오늘은 바람이 롤러코스터처럼 분다.
하늘은 점점 더 높아지고 낙엽은. 쌓여가고 책은 자꾸 눈에서 벗어나고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가 그러다가
엉덩이에 모터라도 달고 자꾸 떠나고 싶어서
길 위에서 만난 수중한 인연이 그리운 사람들이 오늘 따라.......바람을 타고,
저 푸른 하늘 위에 점점이 구름처럼 뭉게뭉게 떠오르는 상상을 한다.
문득 노을 아래 메콩강에 띄워보낸 그 마음이 떠올랐다.
떠나간 여름처럼 그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