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병실 일기 1
2015년. 8월. 병상에서 자판을 꾹꾹 눌러 쓴 일기를 읽는다.
당시 나는 전방 십자인대 재건 수술을 받고 재활에 여념이 없었다.
나는 이렇게 썼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소가 되새김질을 하듯 되뇌이듯이.
이 또한 지나가리라.
과거를 복기하고 삶을 되새기고 하루를 암송한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2015년 8월 19일
동이 튼다. 마음에 한 줄기 서광이 비친다.
배낭여행을 다닐 때 언제부터인가 창문이 없는 방. 밖이 내다보이지 않는 방. 아침에 빛이 들지 않는 방을 견딜 수 없었다. 게스트하우스 방을 구할 때마다 도미토리 건 아니건 무조건 창가 쪽을 오케이 했다. 반면 비행기나 열차 또는 버스( 심지어 극장안에서도)는 오직 통로 쪽을 선호한다. 창가쪽은 혼자 앉으면 모를까. 옆에 모르는 승객이 앉기라도 하면 사방이 막혀서 창문 없는 독방에 탈출구 없는 밀실에 갇힌 느낌이 든다. 답답하다. 화장실이라도 가려면 매번 나 때문에 옆좌석 승객에게 양해를 구해야하는 건 더 싫다.
운 좋게도 창문 바로 옆 침상. 병실에 자력으로 열 수 있는 코딱지만한 창문이 달랑 하나 있다. 같은 방을 쓰는 환자들이 TV보기 불편하지 않냐고 묻는다. 맞다. 이 자리는 TV 를 보기엔 사각지대다. 하지만 빛을 포기하느니 차라리 TV 를 포기하겠다.어차피 집도 TV 가 없는걸.
매일 병상에 누워 있는 답답한 일상에서 세상 돌아가는 광경을 지켜볼 수 있는 유일한 즐거움과 기쁨. 하늘을 눈 안에 담을 수 있다는 게 해돋이와 해넘이를 누워서도 볼 수 있다는 게 내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 지 당신들은 모른다. 이 자리는 숨쉬는 허파다. 그나마 숨통이 트인다. 거기에 책과 음악과 인터넷만 있음 된다. 그럼 됐다.
몸이 아프거나 수족을 다치고 나면 그제야 알게된다. 병 없이 다친 데 없이 건강하다는 게 절대로 당연한 게 아니었음을. 사실 세상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다. 사지 멀쩡할 때는 그 소중함을 모른다. 뭐든 잃고나서야 깨닫는 것이다.
지금 나는 부자유한 몸뚱이에 갇힌 존재라는 자각을 하루에도 수백번 하는 중이다. 다른 건 다 견디겠는데 상실과 박탈 부자유의 고통이 무엇보다 크다. 무엇이든 스스로 책임지고 감당하려는 자, 남에게 의지하기보다는 차라리 혼자 견뎌내는, 그런 성격인 사람에게 남의 도움을 받아야만 가능한 일이 있다는 것은, 특히 타인의 손길 없이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은, 무엇보다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한 나약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모욕이고 고통이다.
병원에 입원하기 전 어느 날 신새벽, 자다가 오줌이 마려워 잠에서 깼다. 그리고 욕실로 가는 중 그 순간 고통이 나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그 자리에 그만 엎어졌다. 아무리 강한 의지로도 제어되지 않고 통제할 수도 없는 몸뚱이에 굴복하는 순간.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무력감이 분노와 절망과 한데 뒤섞여 북받혀올랐다. 스스로 서지 못하는 다리를 부둥켜안고 바보처럼 엉엉 울었다. 목놓아 꺼이꺼이 울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갑자기 가슴 속에서 무언가 깨끗하게 씻겨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홀가분했다. 머릿속이 개운해졌다. 그리고서 나는 마음을 내려놓았다.
어쩔 수 없다. 안 되는 건 안되는 것이다. 받아들여야 하는 거다.
껄껄 웃음이 나왔다. 어린 시절 한 때는 병원에 입원해 보고 싶었다. 한번쯤은 나도 환자복을 입고 병상에 누워 있고 싶었다. 휠체어를 끌고 링거를 걸고 다니는 사람이 부러웠다. 학창시절 양호실에 아파서 누워있는 급우들을 볼 때마다 저들은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걸까 혹시 꾀병은 아닌걸까 궁금했다. 병원에 입원하는 게 소원이었다니 천둥벌거숭이가 따로 없었다. 철딱서니 같았던 그 때는 질병과 사고와 부상에 뒤따르는 엄청난 고통과 시간과 비용을 까마득히 몰랐다.
난생 처음 휠체어와 목발을 쓰면서 이게 얼마나 번거롭고 거추장스러우며 수고스런 노동인지를 매일 매순간마다 경험한다. 고작 며칠밖에 안 됐는데도 일상 모든 게 어렵고 힘들다.
수족이 자유로울 때 의미없이 자동으로 무의식적으로 수행이 가능했던 동작이 이제는 고도로 집중하고 신경쓰고 예민하게 반응해야만 가능하다. 휠체어에 앉아서 목발을 디디면서 문턱 앞에서 문손잡이 앞에서 계단 앞에서 세면대에서 번번이 좌절을 경험한다. 화장실 가고 오고 치료 받으러 층을 오르내리고 냉장고를 열고 닫고 침상에 오르다 보면 탈진한다. 병실로 돌아오면 기진맥진.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젠장, 적어도 6주간은 목발신세다. 요즘 같아서는 두 다리로 당연하게! 멀쩡히 걷는 사람이 제일 부럽다.
평생 장애를 안고 사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일시적 한시적이 아니라 영구적 손상을 지니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겪어보지 않고서는 절실하지 않은 법. 무심하게 여기던 것들이 소중히 여겨지는 법. 타인의 고통이 내 고통이 될 때야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것이, 느끼지 못했던 것이 보이기 시작하고 내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때때로 운명은 장벽보다 더 가파른 비탈길을 내달리기도 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곳으로 삶을 이끌기도 한다. 원하지 않았으나 어차피 벌어진 일, 이 경험으로도 배울 것이 있을 거라 믿으며. 오늘 해가 뜨고 지고 내일에도 해가 뜨듯이.
이 또한 지나가리라. 곧 익숙해지리라.
시간이 약이다. 서두르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