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병실 일기 2
I.
수술 전후를 기록하다. 아침 9시 첫 수술을 기다리면서 수액을 맞고 있는 나를 찍었다. 세시간에 걸친 수술은 정오에 끝났다.
MRI 병명 진단. 전방 십자인대 완파. 반월상 연골 파열. 물렁뼈 손상.
진단에 따른 수술명은 ACL- R (allo), MMmeniscectomy(s), microfx LTP Rt.(이게 뭔 소리래?)
쉽게 말해 전방 십자인대 (타가건 이식) 재건술. 반월상 연골 봉합술. 미세 천공술.(그래도 뭔 소리래?)
다치지 않았다면 평생 가도 한번 들어볼까 말까한, 여지껏 듣도 보도 못한 전문 용어와 어휘들이 수도 없이 입에 오르내리고 귀에 들락날락한다. 한달 전에 사고가 났는데 이 정도로 대형사고인줄은 꿈에도 몰랐다. 역시 모르면 용감하다, 무식하면 몸이 고생한다는 말은 나를 두고 하는 소리다.
의사와 진찰 면담 시간.
의사: 아니 왜 이제 왔어요?
나: ...................
의사: 이 지경에 되도록..... 남들은 사고 나자마자 곧장 119 타고 실려오는데. 뭐했어요?
나: .................
의사 : 도대체 어떻게 걸어다녔어요?
나: 그.... 그러게요.
의사: (긴 한숨)
나: 기... 깁스 하고요.
의사: 더 늦음 안돼요. 벌써 무릎 강직 왔어요. 이럼 수술 예후도 심각하게 안 좋고 재활할 때 고생합니다.
나: 그럴리가요.
의사: 됐고. 당장 수술해야 합니다.
나: 에이.....농담이시죠?
의사: 제가 농담하는 거로 보입니까?
나: 아니 뭐...그게 아니라.....
의사: 다리 절고 싶어요?
나: ......!
단호한 어투로 정색하는 의사에게 나는 적이 당황했다. 진짜인가? 설마 나 못 걸을 수도 있나? 초점잃는 내 눈은 허공을 이리저리 헤매다 의사가 앉은 테이블 모서리로 급강하했다. 연착륙은 애시당초 글렀고 경착륙이라도 할 수 있으려나. 큰일났다. 어쩌지? 나도 모르게 농담이랍시고 헛소리를 하고 말았다.
나: 하하하! 근데 이게 뭐냐? 이게 그 수술이 뭐..제가 남자였음 군대면제 라면서요?
의사: ..........
내 농담에 입을 굳게 다문 채 전혀 웃지 않는 의사.
그저 날 측은하게 바라봤다.
II.
수술대 위에 오른다. 동상 걸릴 정도로 등짝이 차갑다. 싸늘하고 차가운 수술실 정경. 냉동고에 얼린 동태가 될 지경. 신경을 마비시키고 저 먼 고통 없는 세계로 보내줄 마취주사가 척추를 향해 피부를 슬며시 열고 들어온다. 프로포폴 수면제 영향으로 나는 바로 정신을 잃었다. 좋았다. 그렇게 내 영혼은 피안의 세상을 둥둥 떠돌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수술대로 급강하했다.
귀에 망치로 뭔가를 마구 때려대는 소리가 수술실 가득 울린다. 경쾌하게 급박하게 스타카토로 땅땅땅땅! 아마도 저건 내 무릎에 대고 신나게 두드려대는 것일 터인데. 가슴께에 쳐놓은 커튼 탓에 의사도 내 무릎도 아무 것도 보이질 않는다.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되어 따로 놀고 있는 기분이 든다. 커튼 아래로 다리가 통째로 사라진 느낌. 거참 희한하네. 그 순간 나는 대장간을 떠올린다. 정형외과 의사는 대장장이와 다를 게 없군. 정과 망치 그리고 칼과 톱으로 갈고 뚫고 때리고 꼬매고. 상상한다. 피가 튄 고글 안경을 쓰고 환부에 얼굴을 박고 수술에 열중해 있을 의사의 얼굴을. 용광로 앞에서 안전모와 얼굴가리개를 쓰고 활활 타오르는 철의 불길과 씨름하는, 풀무질하는 대장장이를.
III.
척추마취를 하면 전신 마취보다 더 늦게 풀린다해서 내심 안심하고 있었는데 속았다! 수술 후 병실로 돌아와 한시간도 못 되어 마취가 풀렸다. 발가락이 꼼지락 꼼지락 하길래 오! 신경이 빨리도 살아 돌아왔군 하며 좋아라했더니 그 뒤에 빰빠라 빠라빰! 지옥으로 가는 문이 활짝 열렸다. 다른 사람들은 적어도 두 세시간 마취 효과를 봤다는 데 난 두 시간이나 일찍 통증의 신세계 그 생지옥을 맛봐야했다.
수술 후 환자들에게 달아주는 무통주사가 있다.무통주사는 환자가 통증 강도에 따라 본인이 스스로 약 용량을 증감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고통을 참을 수없어 빛의 속도로 다다다 단추를 클릭하지만 아무리 많이 누른들 1번 클릭 하면 15분 동안은 주사액이 나오지 않는, 아픈 환자를 미치게 하는 요술 같은 작동원리. 수술 환자는 무통주사가 이름과는 달리 완전히 통증을 없애주지 못한다는 환장할! 사실을 고통에 덜덜 떨면서 무참히 깨닫게 된다. 이건 사기잖아! 이런 기만이 있나. 통증 경감 주사 정도로 겸손한 이름을 달았어야할 게 감히 무통이라니. 배신감에 부르르 떨지만 이미 후회하기엔 늦어버렸으니.
게다가 불행하게도 내게 무통주사는 통증 경감 근처도 가지 못했다. 간에 기별도 안 간 밥풀떼기 정도. 다리는 산 채로 화형을 당한 듯 불에 활활 타오르고 동시에 벼락에 맞은 몸뚱이는 몇만 볼트에 감전된 듯 사시나무처럼 떨리는데 앙다문 입에서는 헛소리가 튀어나갈 것만 같고 이마와 등짝엔 식은땀이 줄줄 눈에서는 닭똥보다 굵은 눈물이 자동으로 비오듯 흘러내린다. 순간 어느 영화에서 본 전쟁터에서 다리를 잃고 팔을 잘린 병사들이 병상에서 죽여달라 살려달라 비명을 지르는 장면을 떠올린다. 이 와중에 그들이 왜 이렇게 이해가 가는지.
진통제! 진통제!
결국 나도 진통제! 진통제!를 부르짖었다. 혈관에 한 방. 그런데 뭐냐. 아무런 반응이 없다. 이런 망할, 통증은 이 따위 정도로는 약하지 약해, 메롱! 산 다리를 망치로 마구 두들겨 때리기 시작했다. 차라리 정신줄을 놓아라 놓아 달라 엎드려 빌고 싶은 순간 다시 엉덩이에 한 방.
정오부터 여덟시간을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무지막지하게 날 물어뜯던 통증이 삼 사십 여분이 지나자 진공 속을 유영하는 깃털처럼 우아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오! 거짓말처럼 고통이라는 지옥의 문이 서서히 닫히고 천사의 나팔소리가 멀리서 속삭이듯 들려온 것이다. 오오! 신비로운 마약의 힘이여! 이 순간 신이 있다면 나는 그 이름을 진통제라 부르리라.
IIII
검색해서 찾아보니 무통주사의 원료는 아편이고 진통제는 모르핀 종류란다. 역시 신이 이 지구상 모든 생명체에게 고통이라는 걸 선사한 이유는 한편으로 이 마약이라는 강력한 쾌락을 맛보기 위해서가 아닐까.
수술 후 삼일 동안 통증이라는 지휘자가 연주하는 교향악 폭탄 세례를 맞고 나서 알게 된 것. 마취가 빨리 풀리고 무통주사도 잘 안 듣고 더 센 걸 맞아야 그나마 행복감에 무한도취되는 날 보면서 다시금 깨닫게 된건데 난 향정신성 마약성 인간이라는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