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재미있게 읽었던 만득이 시리즈 책이 있었다. 학교 끝나고 나오자마자 교문 앞 떡볶이 가게와 방방 가게의 사이에 있던 문방구에서 팔던 손바닥 만한 크기의 유머책. 거기에는 짧고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었는데, 요즘 같은 계절이 되면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있다.
한 커플이 추운 겨울에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와 로맨틱한 분위기를 만들어보고자 말했다.
"오빠, 나.. 너무 추워."
여자는 이렇게 말하면 남자가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자신의 어깨를 감싸줄 줄 알았다.
그러나 남자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추워? 그럼 뛰어!!!"
그리고는 헛둘, 헛둘, 소리를 내며 저 멀리 먼저 뛰어 나갔다.
어린 시절, 나는 이 에피소드를 보고 이 얼마나 낭만 없는 이야기인가.. 하면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더랬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사실 이 남자는 좋은 남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낭만은 좀, 떨어지지만.
어김없이 돌아온 월요일.
원래대로라면 학교에 가는 발걸음이 설레고 행복했을 텐데 유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기가 싫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도 있겠지만 요즘 학교에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대화로 나는 그 사람과 나의 동료로서의 신뢰 관계가 공든 탑이 무너지듯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런 내 기분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티 내고 싶지도 않고, 나의 기분이 태도가 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점점 쉬는 시간에 연구실에 가는 횟수를 줄였다.
매일 사람들과 소통하고 이야기를 나누던 연구실에 가지 않게 되니 처음에는 허전한 마음이 들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장점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사람들과 있으면 어떻게든 사람들을 웃게 하고 싶어서 계속 사람들의 표정과 기분을 살피고, 밝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주도해 나가는 성향이 있는데 연구실에 가지 않고 오롯이 교실에 있으니 나의 에너지를 아껴 스스로에게 좀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업무를 더 빨리 끝내게 되고, 읽고 싶었던 책도 조용히 읽을 수 있고, 아이들과도 더 많이 웃고 소통할 수 있었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자주 나누지 못하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방과 후에 그 사람들이 내 교실로 찾아와 주고, 나도 필요한 사람의 교실에 찾아가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나누고 오니 그것도 정스럽고 좋았다.
월요일은 일주일에 한 번 모이는 배구 동호회를 가는 날이다.
학교 일을 마무리하고 집에 와서 간단히 저녁을 챙겨 먹었다. 원래 배구를 하러 6시까지 가는데 이번에는 우리 반 아이들이 부탁한 유튜브 영상을 편집하여 올리고 가느라 시간이 늦어 6시 반이 넘어서 도착했다. 체육관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와서 몸을 풀고 있었다. 나도 겉옷을 벗고 운동을 하려고 준비를 하려고 하는데 누군가 헐레벌떡 나에게 달려왔다.
"부장님! 오늘 늦게 오셨네요? 저는 30분 전에 왔는데 부장님이 안 계시길래 오늘은 안 오시나 생각했어요."
1학기에 기간제 교사로 같은 학교에 함께 근무하다가 임용고시를 보러 떠난 후배 선생님이었다.
"오~ 선생님 일찍 오셨네요! 아이들 유튜브 영상 만들어주다가 늦었어요. 우리 저기 가서 같이 운동해 볼까요?"
나는 후배 선생님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바로 운동에 합류했다. 참 신기한 것이, 나는 사실 이 선생님과 내가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1학기가 끝나고 임용고시 준비를 하려면 굉장히 바쁠 테고, 시험을 보고 나서 합격한다면 어디로 발령이 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와 내가 다시 만날 확률은 아주 희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두 달째 다니고 있던 배구 동호회에서 이 사람을 다시 만날 줄이야. 역시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다.
아침에 일어날 때에는 몸을 일으키기가 싫었지만 어떻게든 출근을 하고, 이렇게 배구 동호회에서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서 함께 팀을 이뤄 운동을 하다 보니 몸도 마음도 너무나 상쾌하고 가뿐해졌다. 하하 호호 웃으면서 즐겁게 경기를 하고, 우리 팀이 득점을 하든 실점을 하든 서로 잘했다고 손바닥을 마주치며 하이파이브를 하고, 서로 진심으로 응원하고 격려하며 2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집에 갈 시간이 되었다.
"선생님, 오늘 경기는 선생님 덕분에 이긴 것 같아요."
나에게 배구 동호회를 소개해준 선생님이 웃으며 말했다.
"에이 아니죠~ 선생님 덕분에 이긴 거죠. 선생님은 진짜 어려운 공도 다 받으시더라고요. 부럽습니다~!"
내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선생님, 다음에 경기할 때 선생님과 00 선생님 팀에 저도 넣어 주세요."
옆에서 웃고 있던 다른 학교 선생님이 말했다. 나는 사람들과 함께 체육관을 나오며 마음 가득히 충만한 기쁨을 느꼈다.
역시, 사람은 사람에게 상처를 받기도 하지만, 결국은 사람에게 위로받는다.
올 한 해 나의 가장 잘한 일은 바로 이 배구모임에 나온 일이다.사람이 우울하고 힘들 때 운동을 하면 절반 이상이 해결된다는 말은 진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