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는 사람을 너무 좋게만 보는 경향이 있어. 이걸 맑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나는 그런 언니가 늘 너무 신기해. 난 기본적으로 사람을 잘 믿지 않거든. 그래서 언니가 사람들한테 상처받을까 봐 걱정이 돼."
동생이 예전부터 나에게 해준 말이다.
그리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친해진 많은 지인들도 나에게 같은 조언을 해주었다.
예를 들어, 부하 직원을 아주 힘들게 하는 관리자나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의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하고는 "그래도 그 사람이 인격적으로 나쁜 사람은 아니잖아." 하고 말하는 나를 보며 친구나 동료들은 "그 정도로 힘들게 하면 나쁜 사람 맞아." 하고 말하곤 했다.
부장님은 어떻게 그 사람한테서 좋은 점을 찾아내냐고, 혹시 부장 일을 하다 보니 세뇌된 거 아니냐고 되묻는 후배도 있었다.
이런 식으로 나는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단점보다는 장점에 포커스를 많이 맞춰서 보려고 하는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사소한 행동이나 말에서 싸한 느낌이 들어도 '에이, 내가 너무 예민한 거겠지. 그래도 좋은 점이 더 많은 사람이잖아.'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나의 이러한, 가끔은 지나친 긍정은 주변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게 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금방 산다는 장점이 있지만 치명적인 단점도 있다.
종종 어떤 사람들은 나의 친절이 그들의 당연한 권리인 줄 알고 당연시하려고 하거나, 갑질을 하려 드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마음속에 숨겨뒀던 칼을 빼들고 '내가 친절한 사람은 맞는데 호구는 아니거든? 사람 잘못 봤어. 나한테 함부로 하면 난 참지 않아.' 하는 스탠스를 취하며 경고를 준다. 그게 눈빛이 되었든, 말이 되었든.
그럼 상대방은 화들짝 놀라서 갑질을 하려던 태도를 거두어들인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정말 싫다. 강약약강인 사람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비겁한 유형의 사람들 말이다. 남자든 여자든, 처음에 대화할 때 사람을 살짝 간 보면서 어떤 사람인지 파악해서 자기보다 아래인 것 같다고 느끼면 바로 우위에 서서 지배하려는 사람들이 정말 치가 떨리게 싫다.
그리고 오늘, 나의 지나친 긍정과 친절이 불러들인 안 좋은 유형의 사람들이 또 있음을 깨달았다. 그건 바로 '애매모호한' 이성들이다.
생각해 보면 언제나 내 주변에는 이런 '애매모호한' 이성들이 있었다. 나의 친절을 은근히 즐기거나, 언어적인 혹은 비언어적인 표현으로 헷갈리게 만들어놓고 "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 하고 확실히 하면 후다닥 내빼는 그런 유형의 사람들. 나는 그렇게 사람 간을 보는 간잽이들이 정말 싫다.
얼마 번에는 절친한 친구의 결혼식에 갔는데 10여 년 전 연수에서 만났던 동료 남자 선생님이 밥 먹을 사람이 없다고 해서 결혼식을 보고 같이 식권을 들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그런데 이 분이 대화하면서 자꾸 나의 어깨나 손을 슬쩍 터치를 하는 게 아닌가? 가령, "야~ 진짜 웬일이니~" 하면서 여자들이 공감할 때 어깨를 찰싹 치듯 하는 그런 리액션이었다. 심지어 그는 유부남인데 말이다.
나는 너무 불쾌하고 짜증이 나서 그 사람이 또 나의 손을 터치하려고 할 때 참지 않고 손을 팍, 쳐냈다. 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의 단호한 눈빛과 거부의 의사가 명확한 제스처에 그는 짐짓 놀란 것 같았다. 그리고 황급히 밥을 먹고 인사를 한 뒤 사라졌다.
이 사람은 '애매모호한' 유형 중에서도 상 쓰레기급이지만, 이 정도 스킨십이 아닐지라도 비언어적인 행동으로 한껏 관심을 표해놓고, 내가 차갑게 선을 그으면 떨어져 나가는 그런 이성들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애매모호한' 이성들 중에 내가 간혹 끌리기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은 바람둥이일 확률이 높고, 회피형 연애를 할 가능성이 농후한데 여자들에게 습관적으로 베푸는 친절이나 따뜻한 말에 혹해서 나도 모르게 끌림을 느꼈다가, '나 지금 불나방인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황급히 후퇴하게된다.
그래도 참 감사한 것이, 하늘은 내가 이혼한 이후에 한 번도 나에게 불나방이 될 기회를 준 적이 없다. 내가 불나방처럼 그런 나쁜 남자에게 끌리면 내 쪽에서든 그쪽에서든 확실히 끝을 내서 내가 큰 상처를 받을 일이 없었다.
그리고 올 해도 어김없이 그랬다.
8월, 9월 나는 두 명의 애매모호한 이성들과 확실히 정리했다. 그러면서 느낀 점은, 나는 절대로 저들처럼 '애매모호한' 이성이 되지 않겠다는 것이다.
다행인 것은 나는 성격이 급해서 애초에 애매모호함을 길게 끌고 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뭔가 이성의 지나친 호감을 느끼면 "그래서 이거 뭔데? 호의야, 호감이야? 확실히 해줬으면 좋겠어."라고 이야기해서 선을 긋거나, 잘 되어 사귀거나 둘 중의 하나인 노선을 선택한다. 그게 나에 대한, 또 상대방에 대한 예의이며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저기 문어발처럼 다양한 이성에게 살짝 걸쳐놓고 그중에 제일 괜찮은 사람을 골라잡으려고 떠보는 사람에게, 그의 안전한 물고기 중 한 마리가 되어주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고, 나 또한 그렇게 어장관리하는 성격이 못 된다.
나는 아무리 누군가를 좋아한다 하더라도, 언제라도 그가 나를 존중하지 않거나 간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그 그물을 찢고 나올 것이다. 그물 속에 대기하면서 겪는 불안과 스트레스보다, 그물을 찢으면서 나올 때의 상처가 훨씬 작고 빨리 아문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지금은 마음이 아프지만이제부터 나는 간잽이 같은 '애매모호한' 이성을 나의 블랙리스트에 넣고, 더 솔직하고 당당하고 매력 있는, 나와 같은 무지개 물고기를 만나 사랑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