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마지막까지 혼란스럽고 힘겹던 9월이 끝났다. 9월의 마지막 일요일 아침, 나는 동생에게 전화를 해서 펑펑 울면서 그동안 내가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아파하면서 꾹 참아왔던 감정을 터뜨렸다. 동생은 오히려 언니처럼 나를 다독이며 말했다.
"언니, 내가 동생이라서 말하는 게 아니라 언니 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밖에 없어. 언니는 정말 소중하고 특별한 사람이야. 너무 맑고 솔직해서 이런 아픔을 겪는 거야. 20대 때 했어야 하는 연애와 아픔을 지금 겪는 거지. 남자를 많이 만나봐야 남자를 알 수가 있거든.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에휴.. 내가 더 속상하다. 나는 언니가 좀 더 계산적이고 약았으면 좋겠는데.. 언니는 예전부터 그게 안돼. 애매한 감정을 기다리면서 즐기지를 못해. 모 아니면 도야. 그래도 언니가 이혼하고 나서 6년 만에 처음으로 이런 감정을 느꼈다는 게 나는 긍정적인 신호라고 생각해."
동생의 위로를 받고 나는 "그래 맞아. 그런데 그게 나인데 어쩌겠어.. 내가 이렇게 태어난 걸.. 나는 그냥 나답게 살 거야. 너까지 속상하게 해서 미안해 흐엉.." 하고 또 한바탕 눈물을 쏟았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고 심란한 마음은 계속 남아 있어서 미용실에 가서 헤어스타일의 변화를 주면서 물리적, 심리적으로 모두 잘라내어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부터 나는 소아암 환자들에게 가발을 만들어주는 비영리단체에 머리카락을 기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했다. 내 마음을 정리하면서 좋은 일도 할 겸, 미용실로 향했다.
2년이 넘게 길러온 머리를 싹둑, 잘라내면서 시원 섭섭한 마음이 들었지만 내가 전부터 하고 싶었던 일이었기 때문에 후련함과 뿌듯함이 더 컸다.
싹둑 자른 머리를 곱게 정리해서 택배 상자에 넣고, 꼼꼼히 포장해서 편의점 택배로 부쳤다. 아들은 일요일 오후에 할머니댁에서 돌아와서 미용실에 다녀온 나를 보고는 울먹이면서 "나는 긴 머리 엄마가 더 예쁘고 좋은데.. 왜 머리 잘랐어?" 하면서 울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엄마의 긴 머리는 아파서 고생하는 어린이들에게 예쁜 가발이 되어줄 거야. 좋은 일에 쓰고 싶어서 자른 거니까 너도 잘했다고 해주면 좋겠어. 그리고 엄마 머리는 엄마꺼니까 네가 싫다고 해도 엄마가 결정할 자유가 있는 거야. 알겠지? 나중에 혹시 여자친구가 생겨도 머리 길러라, 마라, 네가 얘기하면 절대로 안 된다?" 하고 미래의 아들 여자친구 얘기까지 꺼내며 나의 단발을 정당화했다.
그리고 나에게 활력을 줄 새로운 일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배드민턴 동호회에 들어가려고 지역 클럽 회장님 번호까지 알아놨지만 그 동호회를 소개해준 구 썸남과 거리를 둬야 할 것 같아서 다른 스포츠 종목을 찾기로 했다.
잠깐 생각하다가 지금은 학교를 옮긴, 작년에 같이 근무했던 후배 K선생님께 카톡으로 연락을 했다.
'샘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죠?ㅎㅎ 다름 아니라 제가 요즘 운동 동호회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전에 선생님이 배구동호회 하신다고 했던 생각이 나서 여쭤봐요^^ 혹시 지금도 나가고 계셔요?'
다행히 오랜만에 연락을 받은 선생님께서는 반갑게 맞아주시며 내일 저녁 6시에 자기가 속해 있는 교사 배구모임에 나오라고 나를 초대해 주셨다.
월요일 아침, 교실에 들어갔더니 아이들이 "와아~ 선생님 머리 자르셨어요? 너무 잘 어울리세요~! 선생님 프로필 사진 보니까 기부도 하셨던데.. 정말 멋지세요!" 하면서 박수와 환호로 나를 맞이해 주었다.
나는 "그래?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얘들아. 기분이 좋아서 선생님이 초콜릿과 쌀과자 쏜다!" 하고 말하며 아이들에게 간식을 나눠주었다.
아이들과 즐겁게 수업을 마치고, 오후에는 우리 학년 연구학교 공개수업 지도안과 PPT를 완성해서 교무부장님, 연구부장님께 기한 맞춰 제출을 했다. 퇴근 시간까지 타이트하게 끝내서 기분이 좋았다.
집에 와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간단히 요기를 한 뒤, 10분 거리의 초등학교 강당으로 향했다. 긴장한 탓인지 내가 가장 일찍 도착했다. 5분 후, K선생님이 도착해서 간단한 안부를 물으며 대화를 나눈 뒤 배구 연습에 들어갔다.
생각보다 연습은 스파르타였다. 저녁 6시부터 7시까지 1시간 동안 거의 쉴 틈 없이 리시브 연습, 서브 연습, 스파이크 연습을 체계적으로 했다. 오랜만에 만난 K선생님이 나를 살뜰히 챙겨주시고, 1대 1로 차근차근 지도해 주셔서 정말 감사했다.
배구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선생님들 나이대도 나와 다 비슷비슷하고, 성비도 얼추 맞아서 활력이 넘쳤다. 사람들 성격도 너무 좋고, 분위기도 좋았다.
7시부터 8시까지는 6~7명이 한 팀이 되어 배구 경기를 했다. 리시브에 성공할 때마다 팀원들이 잘했다고 칭찬해 주고,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조금씩 마음의 문이 열렸다.
'사람들과 함께 저녁에 스포츠 동호회를 하는 게 이렇게 즐거운 일이었구나..'
그동안 아이를 키우느라 저녁에 이런 동호회를 할 생각은 꿈도 못 꿨었는데 이제 아이가 많이 크고 나니 이런 호사도 누릴 수 있음에 새삼 감사해졌다.
8시 10분쯤 배구를 마치고, 함께한 선생님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선생님들께서 "앞으로 계속 나와서 같이해요, 우리~ 선생님 성격이 너무 좋으세요." 하고 말씀해 주시는데 정말 감사하고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