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삼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두 살 터울의 오빠와 세 살 터울의 여동생 사이에 낀 나는 어릴 때 굉장히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예절교육을 중시하시는 부모님 아래에서 엄격하게 자란 나는 어디에 가서 무언가를 물어보고 싶을 때에도 머릿속으로 이게 과연 내가 말해도 괜찮은 내용인지를 스스로 두 번, 세 번, 검열하면서 속으로 수없이 연습하다가 그만 포기해 버리고 혼자 동동거릴 때도 많았다.
그랬던 나의 성격이 바뀐 것은 학교에서 공부를 열심히 해서 칭찬과 인정을 자주 받게 되고, 다양한 노력을 통해 긍정적인 성취의 경험이 쌓이면서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이 올라가고 내가 어떤 질문을 해도 나는 '안전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나는 기본적으로 자기 검열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하는 질문이 보통 무례하거나 선을 넘는 수준이 되지않는다.
어제 급식소에서 반찬을 받으면서 내가 좋아하는 감자채볶음을 보고, "어? 실무사님~ 저 요거 좋아하는데 조금만 더 주세요~^^" 하고 애교 섞인 말투로 말하는 나에게 스스로 깜짝 놀랐다.
문득, 학창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의 나는 절대로 그런 말을 할 수 없는 아이였다. 더 먹고 싶어도, 덜 먹고 싶어도 배식대에서 눈치를 보며 그저 입을 꾹 다물고 받기만 했던 어린 나와 현재의 내가 오버랩되면서 나, 참 많이 성장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글을 내 친구들이나 학교에 있는 동료 선생님들이 본다면 깜짝 놀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나는 친구들이나 동료들에게 늘 당당하고 밝은 에너지를 뿜어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급식소에서 반찬을 받으면서 "더 주세요" 한 마디도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소심했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은 그들에게 믿기 힘든 일일 것이다.
어제 쉬는 시간에 퇴직하신 기간제 선생님들 두 분과, 동학년 선생님들 몇 분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선배 선생님께서 나에게 "자기는 진짜 외향적인 사람이야~ 어쩜 그렇게 밝아, 사람이!" 하면서 나와 함께 있으면 즐겁고 기분이 좋다고 칭찬을 해주셨다.
나는 그 칭찬에 기분이 좋은 반면, 앞으로도 이런 밝은 분위기를 이끌어가야겠다는 부담도 생겼다. 내가 일부러 그렇게 한 게 아니라 밝고 명랑한 성격이 나의 일부이긴 하지만, 나는 진지하고 편안한 텐션으로 이야기하는 것도 좋아하는 사람인데 왠지 그런 칭찬을 들으니 그 선배 선생님 앞에서는 언제나 밝은 텐션만 보여드려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언제나 같이 있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이나 기분을 살피고, 불편한 기색을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머릿속으로 궁리를 한다. 한 마디로 눈치를 보는 것이다.
좋은 말로 하면 같이 있는 사람들의 분위기를 좋게 한다는 장점이 있으나 나 스스로에게는 많은 부담과 압박을 주는 일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고, 학년의 분위기를 편안하게 만들고, 한 해의 마무리를 좋게 할 수 있어서 만족스러울 수 있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나는 마치 물 위에 떠있는 오리처럼 겉으로는 평화로우나 속으로는 다리를 버둥거리는 것처럼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다.
타인을 배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나'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에 대한 가치도 중요하다. 타인의 기대로 인하여 나의 현재가 너무 버겁다면 그 기대를 다 충족하지 않고 내가 편안한 만큼만 해도 된다.
누군가 나에게 실망한다고 해도 그것은 그 사람의 몫이지 나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나' 다우면 된다.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너무 보지 않아도 된다.
나는 더 이상 예전의 작디작던 어린아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 이렇게 말해도 내가 쌓아온 나의 경험이, 성격이 금방 바뀌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글을 쓸 때만큼은 눈치 보지 않고 훨훨 날듯, 그렇게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