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책쾌 강연
콘텐츠 시대, 당신은 어떤 이야기를 하시겠습니까?
지난 10여 년간 독립출판(Indie Publishing)은 한국에서 하나의 문화적 흐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소규모 출판사와 개인 작가들이 자신의 목소리와 감성을 담아낸 독립출판물은 대형 출판물과는 다른 결을 지닙니다. 작은 서점과 북마켓을 중심으로 지역의 이야기와 사람들의 삶이 책 속에 담기며, '로컬리티'라는 가치가 자연스럽게 스며듭니다.
우리는 이제, 자기 자신이 하나의 브랜드가 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나라는 사람, 나라는 콘텐츠, 나라는 이야기가 세상과 연결되는 시대. 독립출판은 그 흐름 속에서, 생각과 개성을 담아내는 가장 솔직한 콘텐츠입니다. 이제 묻습니다. 당신은 어떤 이야기를 하시겠습니까? 단지 '책을 파는 것'을 넘어, 나와 지역, 삶과 사람을 담아내는 콘텐츠를 만들 수는 없을까요?
콘텐츠 시대, 당신은 어떤 이야기를 하시겠습니까?
독립출판은 나와 지역, 나의 삶을 담아내는 가장 솔직한 콘텐츠입니다.
이제 당신만의 이야기를 꺼내보세요.
콘텐츠 시대, 당신은 어떤 이야기를 하시겠습니까?
한옥 지붕이 빼곡한 전주한옥마을 전경 뒤로 현대적 건물이 보입니다. 이처럼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풍경은 한 도시의 지역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지역이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임을 말해줍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콘텐츠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유튜브를 켜면 전 세계 사람들이 올린 영상이 쏟아지고, 서점에 가면 다양한 주제의 책들이 넘쳐납니다. 이렇게 넘치는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정작 우리 자신의 이야기는 어디에 있을까요?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고, 영상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바로 이 자리 ‘전주책쾌’ 북페어에도 각자의 이야기를 간직한 독립출판물과 창작자들이 모였지요. 자, 콘텐츠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떤 이야기를 하시겠습니까?”
독립출판: 모두가 이야기꾼이 된 시대
한때 책을 낸다는 것은 대형 출판사를 통해야 하는 어려운 일이었지만, 이제는 독립출판이라는 창구를 통해 누구나 자신의 책을 만들 수 있는 시대가 열렸습니다. ‘독립출판’이란 작가가 기획, 집필, 편집, 디자인, 인쇄부터 유통까지 책 출간의 전 과정을 직접 수행하는 출판 형태를 말합니다. 2010년대 초반에는 소량 제작되고 ISBN이 없는 아트북 등을 가리켰지만, 10여 년이 지난 지금 그 의미와 영역은 훨씬 넓어졌습니다. 독립출판과 차이가 있지만 자가출판, 1인출판, 자비출판도 독립출판과 혼용되어 쓰이기도 합니다.
참고 자료
사실 생각해보면, 개인이 작은 규모로 책을 만들고자 하는 움직임은 예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다만 오늘날 기술과 문화가 발전하면서 이러한 움직임이 ‘독립출판’이라는 큰 흐름으로 모이고 대중화되었을 뿐이지요. 대형서점에서 받아주지 않던 책이 독립서점에서 유통되면서, 독립출판물을 취급하는 서점이 늘어나면서, 수익구조가 빈약한 서점과 제작자가 독립출판 워크숍을 수익모델로 삼 으면서, 인터넷 POD(Print On Demand) 인쇄소를 통해 한 권부터 책을 찍어낼 수 있는 기술적 환경과,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작은 출판사를 차릴 수 있을 정도로 장벽이 낮아진 사회적 환경이 독립출판 붐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이는 곧 1인 창작자 시대의 도래를 의미합니다. 이제 우리는 TV 앞에 앉아 리모컨으로 남이 만든 프로그램을 고르는 데서 벗어나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 내 방송을 만들듯이, 서점에서 남이 만든 책을 고르는 데서 벗어나 내가 원하는 책을 직접 만드는 시대에 들어섰습니다. 말 그대로 읽기만 하는 ‘독자’의 시대를 넘어, 쓰는 ‘창작자’의 시대가 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까지 사람들이 책을 만들고자 할까요? 그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 삶의 경험, 내가 속한 지역의 이야기, 내가 사랑하는 무언가에 대한 기록을 세상과 나누고 싶은 열망이지요. 개인화된 사회도 영향이 있겠지요. 이유를 단 하나로 보는 것보다 다각도에서 바라봤으면 좋겠습니다. 각자의 이유를 찾는 것도 중요한 것 같고요. 어쨌든 독립출판은 출판 시장의 상업논리에서 벗어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분명하고 전달 의지만 확고하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실제로 콘텐츠 시대의 독립출판물들은 베스트셀러가 되지 않아도 자신의 팬층을 형성하며 꾸준한 호응을 얻어 왔습니다. 이제 ‘모든 사람을 위한 책’은 옛말입니다. 오히려 작은 틈새시장과 특화된 콘텐츠를 공략하는 것이 독립출판의 성공 열쇠로 여겨집니다. 대량 인쇄와 대중 판매에 목매던 과거와 달리, 요즘 독립출판 작가들은 깊이 공감하는 ‘나만의 독자’를 위해 책을 만드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를 통해 독자는 자신만의 취향과 가치를 담은 책을 만나고,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펼쳐낼 수 있게 되었지요. 모두가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진 이야기꾼이 되는 시대 – 이것이 콘텐츠 시대의 독립출판이 가진 의미입니다. 이번엔 개인의 이야기에서 조금 더 확장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지역성: 정체성이자 살아있는 과정
지역성(Locality)이란 무엇일까요? 흔히 한 지역의 고유한 정체성을 떠올리지만, 그것은 단지 과거에 규정된 특성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지역성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삶과 문화, 그리고 그들이 엮어가는 이야기가 모여 지역의 정체성을 이루고, 또 날마다 새로운 이야기로 갱신됩니다. 다시 말해, 지역성은 그 지역 사람들의 정체성이자, 그 정체성을 끊임없이 만들어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이 점에서 출판과 지역성은 깊이 연결됩니다. 지역의 이야기, 지역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은 콘텐츠는 그 자체로 지역성을 표현하는 매개체가 됩니다. 예를 들어 한 작은 마을에서 펴낸 독립잡지가 있다고 상상해봅시다. 그 잡지에는 마을의 오래된 가게 이야기, 동네를 흐르는 강의 생태, 할머니들의 손맛 나는 레시피 등 외부엔 잘 알려지지 않은 로컬 스토리가 실리겠지요. 혹시 사진에 나온 지역 잡지들을 본 적이 있으신가요? 이러한 출판물은 그 지역 사람들에게는 우리 동네의 정체성을 재확인하고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통로가 되고, 바깥 사람들에게는 새롭게 그 지역을 알아가는 창문이 되어줍니다.
지역의 이야기를 책으로 묶어낸다는 것은, 지역성을 문자와 이미지로 기록하여 보존하는 동시에 멀리까지 전파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출판 콘텐츠는 물리적 한계를 넘어 확장될 수 있기에 지역성 전파에 유리합니다. 한 지역에서 열린 전시나 행사는 그 현장에 가야만 경험할 수 있지만, 책이나 웹 콘텐츠는 우편이나 인터넷을 통해 어디로든 전해집니다. 약간 다른 이야기이지만, 여기 모인 분들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모인 이러한 행사가 지속성을 지니려면 웹으로 많이 퍼져야 합니다.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기록일지도 모르겠지만, 작은 기록이 이 행사가 꾸준히 이어질 수 있게 합니다. 우리가 책을 홍보하는 것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지요. 블로그에서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까지 유행도 변해왔습니다. 최근에는 틱톡과 유튜브가 다른 마케팅을 모두 잡아먹고 있지요.
어쨌든 책과 웹 콘텐츠는 다른 상품에 비하여 자본도 비교적 적게 듭니다. 실제로 지역에서 예술이나 문화를 활성화하는 방안으로 출판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지역에서는 대형 문화행사를 유치하기 어렵지만 작은 출판물 하나로도 다른 지역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콘텐츠만 충실하다면 큰 자본 없이도 의지와 노력만으로 작품을 만들고 발표할 수 있는 시대이니까요. 화면의 사진은 전주책쾌에 오기 전에 부리나케 업로드하고 온, 저희 서점이 있는 강서구 지역 다큐입니다. 꾸준히 촬영하고 기록, 수집했던 자료를 바탕으로 만들었는데 생각한 것보다 반응이 괜찮습니다. 강서구는 향토사 조사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아쉬움에 저희 다시서점은 자체 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쉽게 퍼질 수 있는 유튜브 영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영상은 차후에 더 정리해서 소규모 책자로 제작할 예정입니다.
이렇게 보면 지역성은 가만히 두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이야기하고 기록할 때 비로소 살아 숨 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지역에도 분명히 그런 이야기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 이야기를 직접 쓰고 묶어낼 때, 지역성은 비로소 현재 진행형의 힘을 얻습니다.
관광과 출판의 패러다임 변화: 대량에서 경험으로, 획일에서 개성으로
콘텐츠 시대의 변화는 관광과 출판이라는 두 영역에서 비슷한 패러다임 전환을 보여줍니다. 먼저 관광을 볼까요?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단체버스를 타고 유명 관광지만 찍고 지나가는 대량 관광이 보편적이었습니다. 어디를 가나 똑같이 붐비는 명소, 형식적인 기념사진… 그러나 이제 여행자들은 그런 틀에 박힌 관광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진짜 ‘현실’을 되찾길 원한다. 대량관광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여행업계의 말처럼, 요즘 관광 트렌드는 지역의 문화를 깊이 체험하고 사람들과 의미 있게 교류하는 ‘경험 여행’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낯선 곳의 생활을 잠시 살아보기도 하고, 그 지역만의 음식이나 축제를 직접 참여하며 느끼고자 하지요. 여행은 더 이상 소비가 아니라 개인의 성찰과 변화를 가져오는 ‘변혁적 경험’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한 조사에 따르면 “여행객의 65%가 휴식보다 새로운 것을 경험하길 원한다”라고 답했고, 일본에선 Z세대가 주도하는 이 체험여행 붐으로 에어비앤비 ‘체험’ 예약이 폭발적으로 늘었다고 합니다. 세계 관광 시장에서도 경험 중심 여행이 급성장하여 2025년에는 그 규모가 1조 달러를 넘을 전망이라고 하니, 여행 패러다임의 변화는 분명해 보입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이미 사람들의 행동 패턴은 바뀌었는데 보여주는 방식이 이를 따라잡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제 다시 출판으로 눈을 돌려봅시다. 과거 출판 시장을 떠올려 보면, 독자는 대형 출판사가 기획한 베스트셀러 위주로 책을 소비했고, 출판사들은 최대 다수의 독자를 겨냥한 획일적인 기획을 하곤 했습니다. 일종의 대량 생산·대량 유통의 논리가 지배적이었던 것이죠.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독립출판의 성장에서 보았듯, 출판 역시 획일적 대중문화에서 개인의 목소리와 이야기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이제 독자는 거대 기획사가 만들어낸 몰개성한 이야기보다, 작가 개인의 진솔하고 특색 있는 이야기에 매력을 느낍니다. 실제로 독립출판 시장에서는 니치(niche)한 주제일수록 충성 독자가 모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틈새를 공략한 특화 콘텐츠 개발이 중요해진 현실이 이를 뒷받침하지요.
* 니치(niche) "틈새"를 뜻하는 말, 생물종이 특정 환경에서 차지하는 생태적 역할이나 지위. 생물간의 상호관계, 환경간의 관계 등을 이유로 형성되는 지위.
가령 예전엔 출판을 엄두도 못 냈을 법한 아주 개인적인 경험담, 지역 주민만 아는 이야기, 매니악한 취미나 소수자 정체성 이야기 등이 책으로 나와 각자의 관객을 만나고 있습니다. 대형 출판사 기준에서는 작은 시장이지만, 콘텐츠 시대에는 작지만 확실한 공감이 더욱 가치 있게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는 관광에서 대량 패키지 대신 소규모 맞춤 여행이 뜨는 현상과 일맥상통합니다. 모두 획일성의 시대가 저물고 개성과 경험의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로컬 성공 사례: 일본과 한국의 이야기
이러한 변화 속에서 특히 지역의 콘텐츠로 두각을 나타낸 사례들이 있습니다. 일본과 한국의 사례를 몇 가지 살펴보면서, 지역성 있는 이야기가 어떻게 큰 파급력을 가질 수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곰 캐릭터 하나로 거둔 관광 성공: 쿠마몬 이야기
귀여운 검정 곰 캐릭터 인형 탈을 쓴 쿠마몬(Kumamon)입니다. 일본 구마모토 현의 마스코트 쿠마몬은 콘텐츠 시대에 지역 이야기를 성공적으로 확산시킨 대표적 사례입니다. 쿠마몬은 2010년 규슈 신칸센 개통을 계기로 구마모토 현에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탄생한 지방 캐릭터입니다. 처음엔 현지 홍보용에 불과했던 이 검은 곰이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국적인 인기스타가 되었지요. 2011년 말 일본 전국 마스코트 인기투표에서 1위를 차지한 후부터는 그야말로 폭발적 반응이었습니다. 경제효과는 어떠했을까요?
2012년 상반기에만 쿠마몬 관련 상품 매출이 118억 엔에 달했고, 2011~2012년 약 2년 동안 쿠마몬이 불러온 경제효과가 1조 2천억 원을 넘었다는 일본은행 보고까지 나왔습니다.
불과 캐릭터 하나가 거둔 성과라고 믿기 어려울 지경이지요. 도대체 쿠마몬의 무엇이 이런 성공을 만들었을까요? 핵심은 스토리텔링과 개방 전략이었습니다. 쿠마몬은 단순히 귀엽기만 한 마스코트가 아니라, “깜짝 서프라이즈를 선물하는 행복배달부”라는 설정 스토리를 입었습니다.
구마모토 현청 직원이라는 공식 직함도 있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각종 이벤트를 벌이거나 해외 출장까지 다니는 등 생동감 있는 캐릭터 활동을 펼쳤지요. 쿠마몬이 등장하는 행사마다 지역 주민들과 관광객들이 함께 웃고 즐기며 구마모토에 대한 호감과 관심을 키웠습니다. 또한 구마모토 현은 쿠마몬의 상업적 이용을 무료 개방하여 누구나 쿠마몬 이미지를 활용해 상품을 만들 수 있게 했습니다.
기업 입장에선 라이선스 걱정 없이 쿠마몬을 디자인에 써먹을 수 있으니 앞다투어 쿠마몬 상품을 출시했고, 그 덕에 쿠마몬은 전국 어디서나 보이는 친숙한 캐릭터가 되었습니다. 스토리가 있는 지역 캐릭터를 만들고, 이를 개방형으로 활용하여 전국적 콘텐츠로 성장시킨 쿠마몬 사례는 지역 콘텐츠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특히 아쉬운 점은 공공개방된 이미지나 저작권이 많지 않아서 이를 콘텐츠로 활용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많이 늘어났지만, 막상 활용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기록물 관리도 기관마다 다르게 되어 있고, 통합되어 있지 않아서 더 활용하기 어렵습니다. 네, 한국에도 지역 마스코트들이 여럿 있지만, 쿠마몬처럼 전국적 인지도와 경제효과를 거둔 경우는 아직 없습니다.
다만 2018년 EBS에서 탄생한 펭귄 캐릭터 펭수가 유튜브를 통해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비록 특정 지역을 대표하는 캐릭터는 아니었지만, 펭수의 성공은 캐릭터에 담긴 서사와 개성이 얼마나 큰 파급력을 갖는지 보여주었지요. 언젠가 한국에서도 쿠마몬 같은 지역 대표 캐릭터가 나오길 기대해봅니다.
후쿠오카 중심지에서 한 시간 반 가량 버스를 타면 갈 수 있는 이토 덴에몬 저택입니다. 이토 덴에몬은 일본에서 탄광왕으로 유명했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약 2300평이라는 광대한 부지에 방 수 25개의 저택을 지었습니다. 온갖 사치를 다한 장인의 기술을 저택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곳은 몇 년 전에 가보았는데요. 하나코와 앤이라는 일본 아침 드라마를 보고 가게된 곳입니다.
하나코와 앤은 소설 <빨강머리 앤> 시리즈를 일본어로 번역 및 출판한 무라오카 하나코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입니다. 빨강머리 앤의 원제목은 "Anne of Green Gables", 직역하면 "초록 지붕 집의 앤" 정도의 의미입니다. 무라오카 하나코가 처음 빨강머리 앤으로 번역을 한 이후 한국에서도 그 제목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지요. 앞서 보여드렸던 저택에 가면 한국어 번역을 비롯해 곳곳마다 오디오 설명도 되어 있습니다. 공간이라는 콘텐츠를 외국인도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해두었습니다. 일본의 경우 드라마나 영화 촬영지, 애니매이션 등을 활용해 관광상품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콘텐츠가 장르를 넘나든다는 점에서, 그리고 하나의 콘텐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각도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에서도 접목시켜볼 여지가 있을 것 같습니다.
작은 마을의 큰 변화: 카와바村과 전주한옥마을
다음은 지역 자체를 매력적인 콘텐츠로 만든 사례입니다. 일본 군마현의 가와바 마을은 인구 3천 명 남짓한 산골 마을이지만, 이곳에 위치한 “道の駅(미치노에키) 가와바 덴엔플라자”는 일본 전역에 이름난 명소입니다. 미치노에키란 고속도로 휴게소 겸 지역홍보관 같은 곳인데, 카와바 덴엔플라자는 마치 작은 농촌 테마파크처럼 꾸며져 있습니다. 지역 농산물을 파는 직판장, 갓 구운 빵을 파는 베이커리, 지방 맥주 양조장과 레스토랑, 아이들이 뛰노는 연못 공원과 모험놀이터까지 갖춰져 있지요. 말 그대로 ‘하루 종일 놀고 먹을 수 있는 곳’입니다.
1990년대 불황에 빠진 마을을 살리기 위한 프로젝트로 시작된 이 장소는 철저히 지역색에 뿌리내린 전략으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지역 농가와 상인이 힘을 합쳐 현지의 신선한 식재료로 먹거리를 만들고, 전통 가옥 풍경을 살린 건물들로 운치를 더했지요. 그 결과 지금은 연간 방문객이 270만 명에 달할 정도로 인기 있는 휴게소 겸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일본 전국의 1,000여 개 휴게소 중 만족도 1위를 여러 번 차지하며 “일본 최고의 도로역”으로 손꼽힌다고 합니다. 시골 마을에 사람들이 몰려오니 일자리와 수익이 생겨 지역 경제가 활기를 띠는 선순환이 이루어졌습니다. 가와바 마을 사례는 지역의 정체성을 경험으로 풀어낸 성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농촌의 이상향”이라는 모토대로, 방문객들은 단순히 물건을 소비하는 것을 넘어 시골 마을의 느긋한 정취와 맛을 즐기는 경험을 하고 돌아갑니다.
이러한 일본 사례는 한국의 지역에도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사실 한국에도 비슷한 예가 있습니다. 바로 이 행사가 열리고 있는 전주의 한옥마을이지요.
전주는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전통 문화와 미식으로 유명한 고장입니다. 특히 전주 한옥마을은 700여 채의 전통 한옥이 운집한 거대한 생활문화유산으로, 전주시가 이를 보존·정비하여 지역관광의 핵심으로 발전시킨 곳입니다. 그 결과 연간 10만 명도 안 되던 관광객이 2014년엔 789만 명, 최근에는 1천만 명 이상으로 폭증했지요. 지금은 서울을 제외하면 제주, 부산 다음으로 관광객이 많은 도시가 전주입니다.
앞으로 전주를 비롯한 우리나라 관광지는 넘어야 할 산이 있습니다.
경쟁 심화, 저출산, 고령화, 가치관의 다양화는 관광은 물론 한국의 사회 체계 전반에 영향을 줄 것입니다. 우리 관광 문화는 깃발투어, 직장여행 등의 대량 관광에서 개인, 가족, 소규모 그룹의 지역을 재발견하는 관광으로, 또 해외여행이나 체험관광, 대안관광으로 변하는 관광 트렌드에 맞춰 변화해왔습니다. 앞으로는 어떻게 변하게 될까요.
지금까지 지역은, 콘텐츠는 어떤 논리로 누군가를 통해 정의되고 구성되어 왔습니다. 전주는 유네스코 음식창의도시로 선정된 맛의 도시이지만, 이제부터 우리는 전주가 무엇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전주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이건 독립출판도, 콘텐츠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천하고 경험하는 것으로, 삶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의미를 찾아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지역 잡지와 독립언론: 작은 목소리가 모여 만드는 큰 울림
지역의 이야기를 전하는 데 잡지나 독립언론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화려한 성공담은 아니더라도, 꾸준히 해당 지역의 정체성을 기록하고 발신하는 로컬 매거진들은 지역 문화의 든든한 기반이 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최근 몇 년간 로컬 매거진 붐이 일었습니다. 서울, 부산, 제주 등 각 지역의 청년들이 앞다투어 자기 도시의 라이프스타일을 다룬 잡지를 펴냈고, 특정 동네의 가게와 사람들을 소개하는 소식지도 많이 나왔지요. 이런 잡지들은 대형 서점보다는 동네 독립서점이나 온라인을 통해 유통되지만, 그 지역을 사랑하는 독자들 사이에서는 작지만 깊은 공감대를 형성합니다. 또 지방자치단체나 지역문화재단이 지원하는 지역 문화잡지들도 있습니다. 문화도시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시민들이 직접 만드는 동네잡지나, 지역문화를 연구하는 저널 등이 지속적으로 발행되어 지역의 과거와 현재를 아카이브하고 있지요. 비록 전국적 유명세는 없더라도, 그 지역을 기록하고 다음 세대에 이야기를 전한다는 의미에서 매우 값진 콘텐츠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풀뿌리 콘텐츠들이 쌓여 있을 때, 더욱 탄탄한 기반 위에서 다른 산업이 커나갈 수 있습니다.
디지털 시대의 로컬 스토리: 유튜브와 AI로 국경을 넘다
이제 우리는 디지털 기술을 통해 로컬 스토리를 전 세계와 공유할 수 있는 시대를 맞았습니다. 유튜브와 SNS에서는 이미 수많은 외국인이 한국의 지역 콘텐츠를 소비하고 있습니다. 외국인들은 댓글로 “언젠가 저 마을을 찾아가보고 싶다”라며 감상을 남기곤 합니다. 이렇듯 우리 동네의 소소한 일상이 누군가에겐 힐링과 동경의 콘텐츠가 되는 것이지요.
또 다른 예로, 한국의 지방 도시를 여행하며 숨어있는 맛집과 풍경을 소개하는 외국인 유튜브 채널들도 다수 생겨나, 해외 배낭여행객에게 현지인만 아는 보석 같은 장소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디지털 플랫폼 덕분에 이제 지역 관광 홍보는 더 이상 공공기관의 전단이나 여행사의 팸플릿에만 의존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1인 크리에이터들이 만들어내는 진정성 있는 영상과 블로그 글이 전 세계 잠재 관광객들을 불러들이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AI 기술의 발전도 로컬 스토리의 전파에 큰 힘이 됩니다. 예전에는 언어의 장벽 때문에 우리말로 된 책이나 영상은 외국인이 접근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이제 유튜브는 AI를 활용해 자동으로 여러 언어로 자막을 달아주고, 심지어 영상의 목소리를 외국어로 자동 더빙해주는 기술까지 실험하고 있습니다. AI 번역기의 성능도 나날이 좋아져서, 현지 작은 출판사의 책도 버튼 하나만 누르면 영어는 물론 불어, 스페인어로 쉽게 변환될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이를 통해 지역의 독립출판물들도 해외 독자와 만날 기회가 늘어날 것입니다. 저는 일레븐랩스와 챗GPT를 사용하고 있는데 해마다, 달마다 기술이 발전하는 것을 보면 좀 두렵기도 합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전주의 한 시민이 영문으로 블로그에 전주 한옥마을의 역사 이야기를 연재하면, 그것을 읽은 외국인 한 사람이 전주 여행을 결심할지도 모릅니다. 혹은 한국의 한 독립서점 주인이 AI 번역 도움을 받아 자기가 펴낸 로컬 에세이를 외국 온라인 서점에 전자책으로 올렸는데, 한국 문화를 동경하는 해외 독자가 그 책을 읽고 큰 감명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디지털 기술은 지역 콘텐츠의 지리적 한계를 깨뜨리고 범위를 전세계로 확장해 줍니다. 이런 점에서 유튜브와 해외 블로그도 활용해보시면 좋겠습니다.
특히 한국은 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국내 시장이 점차 축소될 것이라는 우려가 큽니다. 실제로 세계 최저 수준인 0.72의 합계출산율로 향후 50년 내 인구가 절반으로 줄 것이란 전망까지 나옵니다. 이런 현실에서 늘어나는 해외 관광객과 한류로 높아진 외국인의 관심은 지역 콘텐츠에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 있습니다. 2023년에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이 1100만 명을 넘었고, 2024년에는 팬데믹 이전 수준인 1600만 명 이상이 방문했습니다.
이제 지역 이야기를 해외에 전하는 일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될지 모릅니다. 다행히 디지털 기술 덕분에 작은 지역도 적은 비용으로 전세계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시대입니다. 유튜브, SNS, 그리고 AI를 잘 활용한다면, 여러분의 이야기는 언어와 국경을 넘어 더 넓은 세상과 만날 것입니다.
결론: 지역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 – 지금 시작해보십시오
지금까지 콘텐츠 시대의 변화상과 지역 이야기에 담긴 가능성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거대한 미디어와 자본의 시대에서 벗어나, 개인과 지역의 소박한 이야기들이 빛을 발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이는 단지 창작자와 예술가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한 지역의 공무원으로서 정책을 만드는 분들도, 지역 관광을 기획하는 분들도, 또는 독립출판 작가를 꿈꾸는 분들도 각자의 위치에서 이야기의 힘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지역 행정을 펼칠 때도 그 안에 이야기와 철학을 담아보세요. 단순한 시설 하나를 짓더라도 “이곳에 얽힌 옛날이야기”나 “지금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스토리텔링하여 시민들에게 공개하면 공감과 참여가 훨씬 높아질 것입니다. 관광 상품을 개발할 때도 대형 관광지보다 작은 골목길로, 사진 찍는 관광보다 삶을 체험하는 여행으로 발상의 전환을 해보세요. 그 안에 담긴 지역의 진솔한 이야기가 관광객들의 마음을 움직일 것입니다.
최근 몇 년 동안 로컬 크리에이터라는 말이 전국을 떠돌았습니다. 그러나 로컬 콘텐츠는 막걸리나 식당을 이름만 바꿔가며 만들거나 하는 양산형 사업으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앞서 말씀드린 사례들처럼 콘텐츠가 만들어내는 미래 먹거리 산업으로 보아야 합니다. 단순한 관광이나 부동산, 사업으로만 보게 되면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비싼 월세로 지역을 떠나거나 사람이 몰려 삶을 잃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행복해야 관광객들도 행복한 모습을 눈에 담아가고, 이곳에서 살고 싶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늘어납니다. 그곳에 머무르는, 정주 환경이 좋지 않은데 지속가능성을 기대하는 건 욕심입니다. 사진을 띄워둔 책들은 일본의 민관협동, 민관협치에 관한 책입니다. ‘ ’는 2015년 유엔에서 채택된 지속가능발전목표 SDGs에서 제시하고 있는 17가지 목표. 전 세계 빈곤 종식, 지구 보호, 2030년까지 모든 사람이 평화와 번영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지역이 안고 있는 이슈를 55가지로 정리한 책입니다.
자, 독립출판을 준비하는 작가라면 대중을 따라가기보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결국 가장 로컬하고 개인적인 이야기가 가장 창의적이고 글로벌한 감동을 줄 수도 있으니까요.
전주는 2021년 책을 통해 삶을 바꾸고, 미래를 준비해가는 '책의 도시 전주'를 선포했습니다. 올해는 작은도서관과 지역작가·지역서점 등과 함께 주민들의 일상으로 찾아가는 책 축제를 열고, 독립출판 및 1인 출판 창업 준비자 등을 대상으로 한 ‘전주출판학교’와 지역작가와 출판사를 대상으로 한 ‘전주도서관 출판 제작지원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지금 이 자리 전주책쾌는 조선시대 책 장수였던 ‘책쾌’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되살려 이 북페어의 이름에 담았습니다. 책쾌가 마을을 돌며 이야기책을 팔고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었듯이, 오늘날 우리도 각자의 책을 통해 세상을 돌며 감동을 전할 수 있습니다. 콘텐츠의 시대, 기술의 시대라 해서 이야기가 특별해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다운 진솔한 이야기의 가치는 더욱 부각됩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라는 것”이라는 말처럼요.
마지막으로, 여러분께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콘텐츠 시대인 지금, 여러분은 어떤 이야기를 하시겠습니까? 그 이야기가 설령 아주 작은 울림일지라도, 진정성이 담긴 한 지역의 목소리라면 반드시 누군가에게 가닿아 큰 공명을 일으킬 것입니다. 여러분만의 이야기를 찾고, 가꾸고, 세상과 나누시길 바랍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 지역과 사회도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라 믿습니다. 여러분의 이야기가 세상과 만날 때, 콘텐츠 시대의 우리는 비로소 서로를 이해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다시서점,
김경현
* 위 글은 제3회 전주책쾌 강연 '콘텐츠 시대, 당신은 어떤 이야기를 하시겠습니까?'을 정리한 것입니다.
* 자리를 마련해주신 전주책쾌에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https://blog.naver.com/dasibookshop/2238951396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