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https://youtu.be/kpOFA5uWrDQ?si=34dqUfraZBD7SIuw
누가 일상을 무너뜨리는가
12월 3일.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단편영화 ‘언박싱’을 봤다. 친구들과 나오면서 감독에게 “영화 너무 잘 봤어요.”라고 인사를 건네고 곧바로 지하철 9호선을 탔다. ‘강서에서 강남을 가는 건 언제나 멀다’라면서, ‘래경 감독 영화 참 잘 찍는다’라면서 의자에 기대었다. 영화관에서 꺼두었던 핸드폰을 켜자 메시지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100개가 넘게 쌓인 단체 채팅방을 들어가자마자 욕지기가 튀어나왔다. “시발, 이거 미친 거 아냐?”
친구들은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한 소식을 전하며 오싹한 기분을 전했다. ‘내란’, ‘일거 척결’ 같은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기함을 토했다. 채팅방에는 ‘미친색히네. 내란이래’와 같은 말이 쏟아졌다. 혹시 짓궂은 장난인가 싶어 포털 사이트와 유튜브를 번갈아 보았다. 11시가 가까워지자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라이브를 켰다. 처음에는 소리가 나지 않던 라이브 방송에서 긴박한 목소리가 들렸다. “국민 여러분 여의도 국회로 가주십시오. 저도 국회로 갑니다.”
강서구 방향으로 함께 가던 동료에게 여의도에서 내려야겠다고 말했다. 어차피 5호선으로 갈아타려면 여의도에서 환승을 해야 했다. 국회에 따라가겠다던 동료에게 “내일 조금 늦을 수도 있으니 가게 문 좀 열어주고, 모레 행사 진행할 수 있는지 아침에 일어나면 재단과 구청에 확인해줘”라고 말하며 헤어졌다. “적어도 한 명은 일해야지!” 제자리를 지키는 사람은 있어야 하니까. 보조배터리를 챙기며 웃었다. “내일 봅시다!” 손을 흔들었다.
11시 35분. 여의도 도착. 국회 방향으로 걷는데 앞서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왠지 ‘오늘은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사랑하는 사람은 없어서 사랑했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다들 잘 사려나. 죽을 수도 있는데 별생각을 다 한다 싶었다. 국회 방향으로 군용 헬기가 날아갔다. 함께 걷던 사람들 발걸음도 빨라졌다. 묵묵히 사람들 발뒤꿈치를 보며 걸었다.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정문 앞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상황이 잘 보이지 않아서 왼편 화단 위로 올라갔다. 내 앞 화단에는 미래 대통령을 꿈꾼다는 유튜버가 누군가와 전화하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고, 사람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계엄철폐 독재타도”를 외쳤다. 함께 목소리를 높이며 SNS 라이브를 켰다. 걱정하는 사람들과 한숨을 내쉬는 사람들, 사실을 알고 놀라며 분개하는 사람들. 아직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모르다가 놀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뒤를 돌아보자 더 많은 시민이 와있었다. 어느새 단체 깃발도 보이고, 언론사도 보였다. 시민들은 목이 쉴 때까지 소리치며 추위에 떨었다. 군용 헬기가 계속 국회로 진입했다. 사람들은 유튜브와 뉴스를 보면서 상황을 인지했다. 정문 앞에서는 때로 소란이 있었고, 누군가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근데 혹시라도, 만약에라도 군인들이 총을 쏘면 어떻게 해야 하지? 이 많은 사람을 다 죽일 셈인가? 정말 제정신인가?
내 앞에서 선창하던 아주머니 목이 쉬어버렸다. 갈라지는 쇳소리가 났다. 곧 나도 목이 쉬었다. 내 뒤에서 선창하던 청년 목도 쉬었다. 쇳소리 위로 쇳소리가 쌓였다. 오전 1시. “계엄 해제안 가결됐대요!” 사람들은 안도하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사실을 재차 확인했다. ‘재석 190, 찬성 190’. 국회 앞 시민들이 환호했다. 그리고 나는 소리쳤다. “윤석열을 탄핵하라!”
찬 공기에서 소리를 지르면 더 멀리, 더 크게 들린다. 국회에 진입한 군인들이 국회 앞에 모인 시민들의 함성을 들었으면 했다. 아마 다 같은 마음이지 않았을까. 사람들은 울면서 소리치고 소리쳤다. 그렇게 새벽 1시 19분. 계엄군이 국회를 떠나기 시작했다. 한껏 긴장한 탓인지 맥이 풀리자 나도 눈물이 쏟아져나왔다. ‘살았다’
굳은 몸을 이끌고 도로로 나오는데 담장 위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이 와중에도 밀치며 걷는, 언젠가 어느 자리에서 보았던 정치 꿈나무들을 뒤로 하고, 인파를 벗어나자 차벽이 보였다. 그리고 그 차벽 뒤로 수많은 사람이 보였다. 핸드폰을 들고 라이브 방송을 하는 사람들과 방송국 기자들, 외신 기자가 보였다. 화단에 주저앉아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20대 여성도 보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불 켜진 국회. 2014년에도 왔었다. 강의로 번 돈으로 세월호 유가족분들에게 드릴 음료수를 사 들고. “음료수만 드리고 바로 나올 테니까 같이 가요” 국회 출입이 안 된다던 경찰은 함께 걸으며 내내 미안해했다. 각자 일을 할 수밖에 없으니까, 어쩔 수 없다는 것도 아니까 사람이나 특정 집단이 미워지지 않았다. 그러나 12월 3일은 달랐다. 이게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니고서야 말이 되나.
제 자리를 지키는 것도 책임감이다. 자기 자기에서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국회 앞으로 나온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도 박수받아야 한다. 그들이 자리를 잘 지켰기 때문에 123일 동안 계속된 윤석열의 내란극이 막을 내린 것이다. 12월 3일, 제 자리를 지키지 않은 군인, 경찰, 국무위원, 국회의원 등은 처벌받아야 마땅하다. 그들이 우리의 일상을 망가뜨렸다.
“근데 나 집에 어떻게 감?” 단톡방 친구들에게 말했더니 금방 데리러 오겠다는 문자가 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깃발은 계속 모여들었다. 소리도 쌓이고 쌓였다. 나는 언젠가부터 아무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정치인, 행정가, 시민사회활동가 등 수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절대 손해 보려 하지 않고, 자신은 고귀하게 여기면서 다른 사람의 돈과 시간, 노동을 쉽게 여기는 모습에 실망이 컸다. 그러나 국회 앞에 모인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앞으로 믿고 따를 사람들은 바로 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큰일이 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비상계엄도 큰일이지만, 더 최악인 상상은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친구 차를 얻어 타고 서점으로 돌아왔다. 모과차를 마시면서 얼어있던 몸을 녹였다. 이 믿기지 않는 일에 관하여 이야기 나눴다. 믿을 수 없는 일. 지금도 나는 종종 나쁜 상상을 하게 된다. 내가 그 자리에서 죽었어도 어떤 사람들은 ‘그러게 왜 갔어’라고 하려나. 계엄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계엄 선포·동조 행위 모두 내란 행위임에도 공범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 저들에게 공동체란 어떤 의미일까.
내 인생에 계엄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들 덕분에 마흔이 되기 전, 하지 않아도 될 경험을 했다. 자유가 제한되었던 그 짧은 시간에 깨닫는 것도 있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명확해졌다.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일상. 그것은 언제 누구라도 깨뜨릴 수 있는 것이다. 언제 누구라도 깨뜨릴 수 있는 것이 깨지지 않도록 사람이 모이고 깃발이 모여야 한다. 사람들이 모인 그 방향으로 걷고, 함께 펄럭일 수 있는 용기.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
시간이 조금 흐르자 책망할 이들을 찾아 탓하는 사람들이 입을 벌리기 시작했다. 다수당이지만 해결하지 못한 정당 탓과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 후보가 되면 왜 안 된다고 생각하세요?‘라고 말하던 대선 후보가 있던 정당 탓, 정치 동아리 수준이라는 진보 정당 탓과 사실상 내란공범이라는 보수당 탓을 하면서 각기 손가락질을 하며 싸우기 시작했다. 정치는 싸움이지만, 남 탓뿐인 사람들은 치졸한 싸움을 한다. 등신들, 지금 그게 중요한가.
12월 29일,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가 일어났다. 사망 179명, 생존자 2명. 언론은 앞다투어 최악의 참사라고 말했다. 1월 15일, 헌정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이 체포되었다. 1월 19일에 윤석열이 구속되었다. 윤석열 지지자들이 서울서부지방법원을 습격하는 폭동을 일으켰다. 크고 작은 사건이 연이었다. 3월에는 전국적으로 산불이 발생했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산불은 경북 5개 시군을 집어삼켰다. 축구장 6만 4260개에 달하는 9만 헥타르가 불탔다.
'민생토론회'를 열어 소상공인과 자영업자 지원을 약속했던 윤석열은 하루 만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4개월 가까이 이어진 계엄 및 탄핵 정국은 특히 자영업자들에게 지옥을 선사했다. 계엄 선포 이후 두 달 만에 20만 명에 달하는 자영업자가 폐업했다. 2023년 폐업 사업자는 98만 6000명이었다. 코로나 시기 생존을 위해 했던 대출 상환이 시작되자 줄폐업이 이어진 것이다. 코로나19도 버텼던 자영업자들은 계엄으로 얼어붙은 내수로 희망을 버렸다.
언젠가 서점을 방문했던 국회의원에게 코로나 대출 상환이 시작되면 자영업자들 곡소리가 나기 시작할 거라고 잘 좀 살펴주시라고 말했다. 돌아오는 답은 “그런가요?”였다. 어떤 사람들은 “힘냅시다”라고 말하지만, 전혀 힘이 나지 않는다. ‘물은 답을 알고 있다’ 식의 유사과학처럼 들린다. 폐업하려면 사업자 자격으로 받은 대출을 즉시 상환해야 하고, 국가 지원을 받으려면 카드 연체를 해 신용불량자가 되어야 한다. 대책이랍시고 상담과 컨설팅 트랙을 만들어대지만, 당장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들에게는 말장난일 뿐.
한국은 자영업자 비율이 높다며 경쟁력 없는 자영업자들은 당연히 도태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해외와 비교하려면 자영업자 비율만을 놓고 단순 비교를 할 것이 아니라 대기업과 중견기업 일자리, 사회안전망도 함께 비교해야 한다. 어떤 기업가는 “도태될 수밖에 없는 자영업자는 도태도 돼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 말을 그에게 그대로 돌려주자면, “비윤리적인 기업은 사라져야 한다.” 언론은 ‘논란’ 정도로 일축하지만, 이런 태도는 기업의 위법 행위를 눈감아 주는 것이다.
왜 기업에게만 너그러울까. 왜 그들은 되고 우리는 안 될까. 그 이유를 찾다 보니 놀라운 사실이 드러난다. 지역 유지인 누구는 일본 앞잡이 노릇을 하던 면장 자식이고, 누구는 일본 놈들 도망갈 때 두고 간 땅을 자기 명의로 돌렸다더라, 누구는 기업을 가져갔다더라. 카더라 식으로 들었던 그 모든 이야기가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세대를 거치면서 회사 이름을 바꾸고, 복지가나 교육가로 둔갑하면서 나름 슬기로운 지역 유지 생활을 이어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수성가가 가능하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이 말은 어떤 이에게는 맞고, 어떤 이에게는 틀리다. 많은 기업가가 자수성가의 환상을 팔았지만, 대부분 친일 매국노의 후손이거나 독재 정권에 빌붙어 큰 거머리였다. 이들은 지역 곳곳에 암약한다. 지역 신문을 만들어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지역 도서관이나 기관을 위탁으로 운영한다. 지역 행정은 편의를 이유로 위탁 업체를 바꾸지 않는다. 모 지역은 도서관 설립 이후 단 한 번도 위탁 업체를 바꾸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전략 공천된 정치인은 그 지역의 미시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지역 유지가 성장해 정치인이 되는 경우에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과의 끈을 놓지 못한다. 지역 유지나 건실한 사업가로 보이는 그들이 있어야 선거에서 이길 수 있기에 큰 논란이 아니라면 눈을 감는다. 지역이 발전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서로에게 상을 주고, 서로를 칭찬하며 관계를 견고히 한다. 사실상 지역의 주인은 그들이다. 행정가들도 이미 알고 있다. 그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제대로 된 행정은 할 수 없다는 것을.
김누리 교수는 한국 사회가 단순히 군사 독재를 극복한 민주주의 사회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의 논리에 의해 지배되는 ‘자본 독재체제’로 전환되었다고 주장한다. 겉보기에는 민주주의가 정착된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자본이 정치, 교육, 공론장 등 사회 전반에 걸쳐 권력을 장악해 민주적 논의와 비판적 사고를 억압하는 체제로 전환되었다는 점을 경고한다. 모든 것을 자본과 경쟁으로 보는 야만이 사회 곳곳에 뿌리박혀 있다.
그리고 야만이 사람을 사라지게 한다. 야만의 스펙트럼은 윤석열처럼 나타나기도 하고, 현대인의 난치병이 된 ‘난가병’에 걸린 정치인들처럼 나타나기도 한다. 각자의 상황과 능력을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획일화해 받아들여 노력을 강조하기도 한다. 생활과 생존을 구분하지 못하고 알량한 지식으로 세상을 판단한다. 눈앞에 벌어진 이 상황을 해결하려 하기보다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말만을 쏟아낸다. 일하지 않고 얻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그들이 자수성가를 이야기하는 꼴이라니.
인구 소멸, 저출산, 고령화 사회만이 사람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웃나라 일본에서 매년 10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증발하는 이른바 ‘인간 증발’도 곧 남의 일이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 윤석열은 12월 3일 비상계엄을 앞두고 시체를 담는 종이관 대량구매를 타진하고, 시신을 임시 보관하는 ‘영현백’을 3천 개 넘게 구입했다. 석방 후 1만명 분을 발주하기도 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인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이 중요한가. 거리에 사람이 없다. 사람들이 사라진다. 누가 우리의 일상을 무너뜨리는가.
김경현 에세이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中에서
에세이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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