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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계엄 선포 1년이 되어 지난 1년을 돌아보며

by 다시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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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3일,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단편 영화를 본 뒤 친구들과 나오면서 감독에게 “영화 너무 잘 봤어요.”라고 인사를 건네고 바로 지하철 9호선을 탔다. 꺼두었던 핸드폰을 켜자마자 메시지가 쏟아져 들어왔다. 알림이 100개 넘게 쌓인 단체 채팅방을 열자마자 친구들은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했다고 전하며 오싹한 기분을 나눴고, ‘내란’, ‘일거 척결’ 같은 말도 안 되는 표현에 모두 기함을 토했다. 혹시 장난인가 싶어 포털과 유튜브를 번갈아 확인했다. 11시가 가까워지자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라이브를 켰고, 처음엔 소리가 나지 않더니 곧 긴박한 목소리로 “국민 여러분 여의도 국회로 가주십시오. 저도 국회로 갑니다.”라고 말했다.

강서 방향으로 함께 가던 동료에게 여의도에서 내려야겠다고 말했다. 어차피 5호선으로 갈아타려면 여의도에서 환승해야 했다. 국회까지 따라오겠다는 동료에게 “내일 조금 늦을 수도 있으니 가게 문 좀 열어주고, 모레 행사 진행 가능한지 재단과 구청에 확인 좀 해줘”라고 말하며 헤어졌다. “적어도 한 명은 일해야지!”라고 말하며 서로 웃었다. 보조배터리를 챙기고 “내일 봅시다!”라고 손을 흔들었다.

11시 35분, 여의도에 도착해 국회 방향으로 걷는데 앞서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오늘은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는 사랑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한때 사랑했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다들 잘 살고 있을까.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 별의별 생각이 들었다. 국회 방향으로 군용 헬기가 날아갔고, 함께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나는 사람들의 발뒤꿈치를 보며 묵묵히 걸었다.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문 앞엔 이미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상황이 잘 보이지 않아 왼편 화단 위로 올라갔다. 내 앞 화단에는 미래 대통령을 꿈꾼다는 한 유튜버가 누군가와 전화하며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사람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계엄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기 시작했다. 나도 목소리를 높이며 SNS 라이브를 켰다. 걱정하는 사람들, 한숨 쉬는 사람들, 사실을 알고 놀라며 분개하는 사람들, 아직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모르다가 뒤늦게 깨닫고 놀라는 사람들이 뒤섞여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더 많은 시민이 와 있었다. 단체 깃발과 언론사 마이크가 보였다. 시민들은 목이 쉴 때까지 소리치며 추위에 떨었다. 군용 헬기는 계속 국회로 진입했고, 사람들은 유튜브와 뉴스를 확인하며 함께 상황을 인지했다. 정문 앞에선 간간이 소란이 있었고, 누군가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문득 생각했다. 혹시라도 군인들이 총을 쏜다면? 이 많은 사람들을 다 죽일 셈인가? 정말 제정신인가?

앞에서 선창하던 아주머니는 목이 쉬어 갈라지는 쇳소리를 냈다. 곧 나도 목이 쉬었고, 뒤에서 선창하던 청년도 목이 갔다. 쇳소리 위에 쇳소리가 쌓였다. 오전 1시가 되었을 때 누군가 외쳤다. “계엄 해제안 가결됐대요!”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사실을 재차 확인했다. ‘재석 190, 찬성 190’. 국회 앞에 모인 시민들은 환호했고, 나는 소리쳤다. “윤석열을 탄핵하라!”

찬 공기에 외침은 더 멀리, 더 크게 퍼졌다. 국회 내 군인들이 밖에 몰린 시민들의 함성을 들었으면 했다. 아마 모두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울면서 외쳤고, 또 외쳤다. 새벽 1시 19분, 계엄군이 국회를 떠나기 시작했다. 긴장이 풀리는 순간 눈물이 쏟아졌다. ‘살았다.’

도로로 나오는데 담장 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 그리고 차벽 뒤로 끝없이 이어진 시민들이 보였다. 핸드폰으로 라이브 방송을 하는 사람들, 방송국 기자들, 외신 기자들, 화단에 주저앉아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20대 여성까지.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불 켜진 국회를 보며 2014년이 떠올랐다. 강의로 번 돈으로 세월호 유가족에게 드릴 음료수를 들고 왔을 때, 국회 출입이 어렵다며 미안해하던 경찰의 얼굴. 그땐 미워지지 않았다. 서로가 각자 일을 해야 한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러나 12월 3일은 달랐다. 이건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니라면 말이 될 수 없는 일이었다.

제자리를 지키는 것도 책임감이다. 각자 자기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국회 앞으로 나온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 각자 자리에서 버틴 이들 모두가 박수받아야 한다. 그들이 자리를 지켰기 때문에 123일 동안 이어진 윤석열의 내란극이 막을 내릴 수 있었다. 반대로 12월 3일, 제 자리를 지키지 않은 군인, 경찰, 국무위원, 국회의원들은 처벌받아야 마땅하다. 그들이 우리의 일상을 망가뜨렸다.

“근데 나 집에 어떻게 감?”이라고 단톡방에 말하자 금방 데리러 오겠다는 문자가 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깃발은 계속 모여들었고, 소리는 더 쌓였다. 언제부턴가 나는 누구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해 왔다. 성인이 된 이후 20년 동안 정치인, 행정가, 시민사회 활동가, 교수 등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그들이 되려 다른 사람의 시간과 노동, 돈을 쉽게 여기고 자신만 고귀하다고 여기는 모습을 숱하게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회 앞 사람들을 보며 깨달았다. 내가 앞으로 믿고 따를 사람은 바로 저 사람들이라는 것을.

큰일이 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비상계엄도 심각한 일이었지만, 최악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친구 차를 타고 서점으로 돌아갔다. 모과차를 마시며 얼어 있던 몸을 녹였다. 믿기지 않는 일을 이야기하며 서로 감정을 나눴다. 지금도 가끔 나쁜 상상을 한다. 그날 내가 죽었더라도 어떤 사람들은 “그러게 왜 갔어”라고 했을 것이다. 계엄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계엄 선포와 동조 행위가 내란임에도 공범이 되길 자처하는 이들. 그들에게 공동체란 무엇일까.

내 인생에 계엄이 있을 줄 몰랐다. 그들 덕분에 마흔이 되기 전에 하지 않아도 될 경험을 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자유가 제한되는 경험을 통해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명확해졌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일상은 언제 누구에 의해 깨질 수 있다. 그렇기에 사람이 모여야 하고, 깃발이 펄럭여야 한다. 사람들이 모이는 방향으로 걸을 수 있는 용기,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 필요하다.

12월 29일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가 일어났고, 사망 179명, 생존자 2명이라는 기록적인 비극이 이어졌다. 1월 15일엔 헌정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이 체포되었고, 1월 19일 윤석열이 구속되었다. 윤석열 지지자들은 서울서부지방법원을 습격하는 폭동을 일으켰다. 이어 3월에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산불이 경북 5개 시군을 집어삼켰고, 축구장 6만 4,260개에 달하는 9만 헥타르가 불탔다.

‘민생토론회’를 열어 소상공인·자영업자 지원을 약속했던 윤석열은 단 하루 만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4개월 가까운 계엄·탄핵 정국은 자영업자들에게 지옥이었다. 계엄 선포 후 두 달 만에 20만 명이 폐업했고, 2023년 폐업한 자영업자는 98만 6,000명에 달했다. 코로나 시기 생존을 위해 받았던 대출의 상환이 시작되자 줄폐업이 이어졌다. 코로나19도 버텼던 자영업자들은 계엄으로 얼어붙은 내수 시장을 견디지 못했다.

한 국회의원에게 코로나 대출 상환이 시작되면 자영업자들 곡소리가 날 거라 말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런가요?”였다. 어떤 사람들은 “힘냅시다”라고 말했지만 전혀 힘이 나지 않았다. ‘물은 답을 알고 있다’는 유사과학처럼 허망하게 느껴졌다. 폐업하려면 사업자 자격으로 받은 대출을 즉시 상환해야 하고, 국가 지원을 받으려면 카드 연체로 신용불량자가 되어야 한다. 상담과 컨설팅을 대책이라 내놓지만 벼랑 끝의 사람들에게는 말장난에 불과했다.

한국은 자영업자 비율이 높다며 경쟁력 없는 자영업자는 도태돼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해외 비교를 하려면 자영업자 비율만 볼 것이 아니라 대기업·중견기업 일자리와 사회안전망까지 함께 비교해야 한다. 한 기업가는 “도태될 자영업자는 도태돼야 한다”고 했지만, 그런 논리라면 “비윤리적인 기업은 사라져야 한다.” 언론은 이를 ‘논란’으로 처리하지만 이는 기업의 위법을 눈감아주는 태도일 뿐이다.

왜 기업에게만 너그러운가. 그 이유를 따라가 보니 지역 곳곳에 뿌리내린 유지들의 뿌리가 드러났다. 일본 앞잡이 면장의 자식, 일본이 도망가며 남긴 땅을 자기 명의로 돌린 사람, 기업을 가져간 사람. 카더라처럼 들렸던 이야기들이 사실이었다. 그들은 세대를 거치며 회사 이름을 바꾸고, 복지가·교육가로 둔갑하며 지역을 지배해왔다. ‘자수성가가 가능하다’는 말은 일부에게만 맞는 신화에 불과했다. 대부분은 친일·독재 정권의 수혜자들이었다.

그들은 지역 신문을 만들어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도서관과 기관을 위탁 운영하며 권력을 유지했다. 지역 행정은 편의를 이유로 같은 업체에 수십 년간 위탁을 맡겼다. 전략 공천된 정치인은 지역의 미시사를 알지 못하고, 지역 유지 출신 정치인은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서 끈을 놓지 못한다. 이 구조가 지역 발전을 가로막는다. 서로 상을 주고 칭찬하며 카르텔을 공고히 한다. 행정가들 역시 알고 있다. 이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올바른 행정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김누리 교수는 한국이 군사독재를 넘어 민주주의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자본의 논리에 지배되는 ‘자본 독재체제’로 전환되었다고 지적한다. 겉보기에는 민주주의 같지만 실제로는 자본이 정치·교육·공론장을 지배하며 비판을 억압하는 체제. 모든 것을 경쟁과 자본으로 환원하는 야만이 사회 전반에 뿌리박혀 있다. 그 야만은 사람을 사라지게 만든다. 윤석열은 계엄을 앞두고 시신을 담는 종이관과 ‘영현백’을 대량 구매했고, 구속 후에도 1만 명분을 발주했다. 지금 거리에 사람이 없다. 사람들은 사라진다. 누가 우리의 일상을 무너뜨리는가. 그날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국회 앞에서 펄럭이던 태극기와 쇳소리처럼 갈라진 시민들의 목소리, 그리고 계엄 해제 후 뒤로 나왔을 때 몰려든 인파와 울고 있던 소녀들이다. 너무 비현실적이었는데 현실이었다.

그날 밤의 경험은 일상에도 영향을 주었다. 다음 날 첫 손님이 경찰이어서 조금 겁이 났고, 서점 SNS와 유튜브에는 이상한 댓글들이 계속 달렸다. 작은 일들이 쌓이다 보니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이 힘들어졌다. 계엄 이후 매출이 곤두박질친 것도 괴로움을 더했다. 그래도 술에 기대는 대신 책을 읽었다. 언제나 힘들고 지칠 때 길을 열어준 건 책이었다. 새벽에 날 데리러 온 친구는 국회 앞을 지켜줘서 고맙다고 했지만, 나는 그 친구가 20대의 청춘을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에 바친 것에 비하면 내가 한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집회에 나가고 작은 연대를 실천하는 건 그저 당연한 일이라 여겼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친구들에게, 그들이 바친 청춘에 보내는 작은 찬사이기도 했다.

나는 민주화를 책으로 배웠다. 1979년 서울의 봄 실패와 서울역 회군의 후회를 다룬 책들을 읽으며 자랐다. 그래서 2024년 12월 3일, 내가 국회 앞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남긴 기록과 반성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모두 또 다른 참사를 막아야 한다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기록은 필요하다. 기록은 미래를 바꿀 힘이 있다. 이 짧은 기록을 남기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계엄 선포 1년이 되어 지난 1년을 돌아보면, 비관과 냉소, 절망과 처참함 속에서도 시민이 새로 쌓은 희망이 가장 강하게 느껴진다. 한남동 집회에서 느꼈듯 사람이 모이면 춥지 않다. 사람의 온기가 가장 따뜻하다는 걸 알게 되니 결국 기대야 할 곳은 사람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우리는 종종 사람에게 절망하지만, 희망도 언제나 사람에게 있다. 힘들면 기대고, 슬플 땐 울고, 기쁠 땐 함께 웃을 수 있는 더불어 사는 사회가 오면 좋겠다.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 1987년 6월 항쟁, 촛불집회, 그리고 2024년 계엄 반대 시위까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역사에는 언제나 시민이 있었다. 지난 1년 동안 성숙한 시민의식이 우리 곁에 존재했고, 그들이 각자 자리를 지키며 민주주의가 후퇴하지 않도록 버텨준 것이 가장 긍정적이었다.

반면 아쉬운 점도 있다. 대안을 만든다며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만, 그저 또 다른 구분만 만들 뿐이고, 정치인들이 나뉘어 싸우는 동안 문제는 숨어버리고 시민들 앞에는 절차만 남는다. 매년 지방의회 의원들이 소득 없는 해외 출장을 가도, 특정 업종을 가진 사람이 계속 뽑혀도, 선거가 끝나면 사람들은 그저 ‘적당히’, ‘잘’, ‘알아서’ 하기만을 기대한다. 지방의회 회의록만 봐도 지자체가 특정 업체에 20년 넘게 위탁 사업을 맡기고 있지만, 목소리가 작은 개인은 바꿀 힘이 없다. 힘이 없으면, 권력이 없으면, 돈이 없으면, 학력이 없으면 모든 문제는 개인 탓이 된다.

2015년 법원은 이석기 의원에게 내란선동으로 징역 9년을 선고했고 검찰은 20년을 구형했다. 11월 26일 한덕수 전 국무총리에게는 내란 방조 혐의로 징역 15년을 구형했다. 사기범 전청조가 15년을 구형받았는데 내란을 방조하고 실행에 옮긴 사람이 똑같이 15년이라는 건 시민들의 상식에 맞지 않는다. 왜 죗값은 같지 않은가. IMF 이후 은행들은 정부가 투입한 공적자금을 다 갚지 않았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 투입된 공적자금도 여전히 남아 있다. 코로나 시기에 은행 수익은 급증했지만 시민의 고통에는 무관심했다. 가계부채를 걱정한다지만, 은행이 시민의 숨통을 조이는 방식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비상계엄 이후의 1년을 떠올리면 정치인들이 사회적 사건을 ‘자산화’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되지만, 정작 시민의 고통을 외면하는 건 냉혹하게 느껴진다. 경제는 소상공인·자영업자부터 기업까지 모두 직접적 손실을 감내해야 했다. 코로나 시기 자영업자를 대출로 연명하도록 만들었고, 그 사이 너무 많은 사람이 사라졌다. 목숨을 끊는 이들이 늘어나며 이웃이 사라지는 게 현실이 되었다. 사람이 죽어가는데 사회는 너무 안일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참사를 겪었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은 여전히 미흡하다.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온 시민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기념되고 호명되지만, 실제 정치적 장면에서는 배제되기 쉽다. 광장에 섰던 이름 없는 시민들이 정치의 언어 속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그들의 정신이 정치적 유산이 아닌 공적 책임으로 이어지도록 만드는 것은 정치인과 사회의 과제다. 항상 함께 싸웠던 시민들의 자리가 비어 있다는 씁쓸한 자각을 우리는 외면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가 진정 시민의 것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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