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워킹맘의 고백
아침 8시. 다섯 살 아들이 잠든 방문을 뒤로 하고 집을 나선다.
아들은 9시가 넘는 시간까지 쿨쿨 자다가 시어머니 손을 잡고 느즈막하게 유치원에 간다. 등하원을 시어머니께 부탁드려서 전쟁 같은 아침은 피할 수 있지만, 그만큼 경제적, 심리적 부담도 있다. 매달 시어머니께 용돈을 드리며 감사함과 미안함을 동시에 안고 산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도움을 받는 나도 매일이 벅찬데, 등하원까지 직접 챙기며 일상을 버텨내는 엄마들은 대체 얼마나 더 힘들까... 생각만 해도 마음이 숙연해진다.
출근하는 길, 머릿속엔 해야 할 업무들과 수업들이 오간다. 한편으론 유튜브로 흘러나오는 재테크 영상을 듣는다. 소수몽키, 삼프로 TV, 부읽남, 월급쟁이 부자들, 슈카월드 등등.. 트럼프의 관세 유예는 무기한 연장될까, 아니면 언젠가 재개되어 경기침체를 몰고 올까? 나는 어떤 포지션을 취해야 하나? 나는 출근길에서도 공부 중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 더 열심히 살고 있는데 마음은 더 지쳐간다. 재테크를 알수록, 놓쳐버린 기회들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때 샀더라면…”, “지금이라도 따라가야 하나…”, “나는 왜 이렇게 늦었을까.” 후회와 초조함이 따라붙는다.
아이를 키우는 것도 마찬가지다. 잠든 아이 곁에서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다른 아이들의 발달 영상, 조기교육 후기, 영어 유치원을 다니며 입이 트인 아이들의 이야기, 정말 열심히 다양한 교육을 시켜주는 엄마들의 육아 루틴 공유 블로그를 보게 될수록, 내 아이는 너무 천천히 가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조급해진다.
나는 교사다. 성적이 나오지 않아 좌절하는 학생들에게는 “실패는 과정일 뿐이야”, “너는 너의 속도로 가면 돼”라고 위로한다. 하지만 정작 나 자신에게는 한없이 가혹하다.
더 좋은 엄마여야 하고, 더 똑똑한 재테크 소비자여야 하고, 더 유능하고 재밌는 수업을 하는 교사여야 한다. 거기에 적절한 운동과 자기관리로 너무 살이 찌지 않아야 하고,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피부까지 유지해야 한다..
어느 하나라도 놓치면 안 될 것만 같다. 그러나 열심히 노력하면 할수록, 역설적으로 나의 부족함이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열심히가 나를 구하는 게 아니라, 나를 질책하는 칼날이 되어 돌아올 때가 있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삶을 노동, 일, 행동으로 구분했다. 노동은 생존을 위한 반복, 일은 세상에 남기는 성취, 행동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워킹맘인 나는 이 셋을 동시에 해내야 한다. 밥을 하고 아이를 재우는 노동, 수업과 성과를 챙기는 일, 아이의 마음과 학생의 미래를 어루만지는 관계적 행동까지. 그런데 아무리 애써도, 매일 한쪽이 비어버린다. 완벽함은 늘 한 발짝 뒤에 있고, 나는 끝없는 추격자일 뿐이다.
완벽한 워킹맘의 표상처럼 보이는 윤송이 대표의 유퀴즈 인터뷰를 보았을 때는, 참 부럽고 배워야 할 점이 많은 분이구나 생각이 들면서도 그분의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갓생 루틴'에 숨이 막혔다. 일도, 육아도, 투자도, 자기 관리도 완벽하게 해내는 여성들. 나는 왜 이렇게 못났나, 왜 이리 뒤처졌나, 자괴감이 밀려온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다시 나를 일으켜주는 생각들을 억지로라도 해본다.
“누군가에겐 평범하고 보잘것 없어 보일 수 있는 이 하루가, 나에겐 기적 같은 버팀이었다.”
지금 이 삶이, 내가 감당하고 있는 이 하루가, 얼마나 벅찬 노력의 결과인지 잊지 말자고 생각해본다.
나는 오늘도 아이를 사랑했고, 학생들에게 지식을 나눴고, 나의 미래를 위해 배우는 중이다. 열심히가 완벽함과 동일한 것이 아니듯, 불완전함이 곧 실패도 아니다.
아이가 밥을 스스로 먹지 못하고 자꾸 떠먹여달라고 할 때, 떠먹여주지 않으면 정량의 절반도 채 먹지 못하고 밥 먹는 것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을 볼 때면, 왜 이렇게 내 아이만 안 따라줄까 속상했던 순간이 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이 아이도, 하루를 살아내느라 이미 지친 건 아닐까.
유치원에서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고, 규칙을 지키고, 나름의 긴장을 안고 보낸 하루가 이 작은 몸엔 꽤 무거웠던 건 아닐까.
나는 퇴근 후 밥상 앞에 앉아 멍해지는 나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면서, 왜 이 아이는 밥숟가락을 쥐고 집중하지 못하느냐고 다그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아이는 아직 자라고 있는 존재이고, 나는 여전히 배우는 엄마다. 둘 다 불완전한 존재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조급함이 아니라 너그러움이다.
불완전함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건 동양철학의 미덕이기도 하다. 일본의 와비사비(wabi-sabi) 미학은 완벽하지 않은 것, 불균형하고 낡은 것에 담긴 고유한 아름다움을 말한다.
아직 아이가 완벽하게 밥을 스스로 먹지 못하는 것도, 내가 깜빡하고 미처 챙겨주지 못한 유치원의 가정통신문의 안내사항도, 실은 우리 삶의 와비사비(wabi-sabi) — 불완전함 속에서 피어나는 고유한 아름다움 — 일 수 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삶은 숨을 쉬고, 엄마도 사람일 수 있다.
열심히 산다는 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서도 나와 아이에게 너그러울 수 있는 용기를 가지는 일이다. 아이가 느리게 자라는 그만큼 나도 느리게 배우는 중이고, 아이가 넘어질 때마다 다시 손을 내미는 나 역시 성장 중이다.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인간 관계를 ‘나-그것(I-It)’과 ‘나-너(I-You)’로 구분했다. 전자는 비교하고 이용하는 관계, 후자는 온전히 존재를 받아들이는 관계다. 요즘 나는 내 아이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조차도 ‘나-그것’의 시선을 두고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소중한 내 아이를 성취의 대상으로, 나 자신을 성과의 합으로 평가하며 살아가고 있으며, 그 '많은 사람들'에 속하지 않기란 또 어찌나 힘든 일인지..
하지만 우리 모두는 사실 알고 있다. 아이는 존재 그 자체로 충분히 소중하다. 나 역시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이다. 우리가 매일 버겁게 살아가는 이 삶 속에서 필요한 건 더 나은 성과가 아니라, 더 너그러운 시선이 아닐까.
완벽한 하루를 살지 못하더라도, 진심을 다한 하루였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오늘도 나는 속으로 되뇐다.
“그렇게 애쓰는 너,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