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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e Sep 18. 2024

우리 가족은 한 명이라도 아프면 안 돼


화근은 점심식사를 먼저 마친 아빠의 말에서 비롯됐다.

"쓰읍-. 요즘에 누워있다가 일어나면, 핑 도는 것처럼 어지럽고 한데 말이야."


아픈 것만큼은 온 가족 신경이 곤두서는 우리 집, 아빠의 한 마디에 에어컨도 안 튼 거실 공기가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질 만큼 차가워졌다. 딴에 병원에서 주워들은 게 많은 나로서는 아는 체 한다며 '갑자기 일어설 때 그런 거면 기립성저혈압 같은 걸 거야.'라고 답했지만, 의사도 아닌 게 말한다고 귀담아듣는 일은 없었다. 듣든 말든 기립성저혈압 아니면 어지럼증 둘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며 첨언했더니, 그제야 아빠는 '그럼 난 어지럼증 같은데'같은 말을 하셨다. 가만히 계시던 엄마는 "그러다가 쓰러지고 하는겨!"라고 말하시든 말든 담배와 라이터를 챙겨 밖으로 나서는 아빠.


추측이라면 아빠가 한 달 정도 술을 끊은 이력이 신경 쓰였다. 술을 여태까지 끊고 있는 건 축하할 일이지만 몸에 밴 습관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데는 시간이 더 걸릴 터, 술과 담배로 다져진 과도한 혈관 수축 중에서 술의 역할이 조금 빠지면서 순환계가 적응하는 기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담배를 피우고 들어온 아빠에게 '담배를 끊고서 아프다 말다 하셔야죠'라고 하고 싶었지만, 술도 겨우 끊고 있는 양반에게 두 가지를 한 번에 해내라는 건 나조차도 못하는 걸 강요하는 것 같아 꾹꾹 참고 나의 예를 들어드렸다.

"아빠, 나도 역류성식도염 때문에 커피 끊었던 적 있거든. 한 이주 끊었던가? 어지럽고 그런 건 아니었는데, 커피를 안 마시니까 한동안 이게 머리가 멍-하더라고. 그러다가 한 이주 지나고 나니 멍 하던 것도 덜해지고 그랬거든. 술 끊은 거 때문이라면 약간 그런 게 아닐까?"


나름 나의 추측에 무슨 답이 올까 기다리는데 "예전부터 벌써 그랬어."라는 답에 할 말을 잃고 다시 또 추리를 해보려는데, 옆에서 엄마가 오전에 있었던 일화를 말씀하신다.

"나도 글쎼, 아까 오전에 바깥에 풀 베고 하는데 갑자기 기운이 쏙 빠지더니 양쪽 어깨 힘이 안 들어가고 아프고 그러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아픈 분이 많나 싶으면서도 예전에 아빠가 허리디스크로 쓰러지고 우리 집이 멈췄던 때가 떠올라서 나도 모르게 읊조리게 됐다.

"하, 쓰러지고 그러면 안돼. 우리 집은 한 명 쓰러지면 진짜 풍비박산 난다."


당장 심각한 사태가 일어난 건 아니지만, 그때의 힘듦이, 병원에서 일하는 내가 봐온 여러 아픈 가족을 케어하는 가족의 모습들이 떠올라 한탄을 하게 됐다. 그러자 엄마가 한 마디 하신다.


"그래, 우리 가족은 한 명이라도 아프면 안 돼.
나도, 아빠도, 넌 젊으니까 더욱더."


엄마의 그 한 마디에 순간 숙연해짐과 동시에 씁쓸함이 밀려왔다.



'아픈 걸 마음대로 아프냐???'


나라면 진작에 이렇게 소리치고 말았을 텐데, 방금까지 쓰러질 뻔했다는 무용담을 말씀하신 엄마가 지금은 아무 이상 없고 괜찮다며 아프면 안 된다고 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픈 것도 마음대로 아플 수 없는 집. 아픈 것도 마음대로 아프지 말라고 생떼 부린 못난 내 모습이 부끄러웠고, 벌써 몇 달째 몸관리를 안 하고 여기가 아프다 저기가 아프다고 투정을 부린 내 모습이 또한 한심하게 느껴졌다. 어저께 보름달에 빌었던 수만 가지 소원 중에 하나가 떠오른다.

‘아프지 말자, 우리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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