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나기를 준비하며
가을 색이 짙어지고 찬바람이 불면 월동준비를 한다. 누구는 김장을, 나무 가지치기를, 스프링클러의 물 빼기를 하고 또 누구는 대청소를 한다. 나는 차고정리가 겨울나기의 일 순위이다. 제설기 때문. 시도 때도 없이 폭설이 내리는 콜로라도. 차고의 문을 올리면 무릎까지 빠지는 눈이 쌓여있는 날. 풍경은 멋스러운 겨울이야기를 건네도 사는 사람에겐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다. 제설을 해야만 차를 뺄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다. 긴 겨울 동안 가장 요긴하게 쓰이는 제설기. 충전은 잘 돼 있는지, 쉽게 꺼낼 수 있게 밖으로 향하는 방향으로 놓아둔다. 여분의 배터리도 충전이 되어 있는지 눈금을 확인한다.
올 가을도 예외는 없다. 깊숙이 놓여 있던 제설기를 꺼내며 흩어져 있던 잡동사니들도 정리한다. 각종 전단지로 반쯤 채워진 종이 상자들. 흩어져 있는 장갑들, 재사용이 가능한 장바구니들, 금방 볼 것처럼 꺼내놓은 오래된 책들.
계절이 지나는 흔적들 사이에서 툭 튀어나온 것. 600자 원고지 한 묶음. 해마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정리를 했었는데 왜 지금 눈에 띄었는지 알 수 없다. 원고지에 글을 썼던 것은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다. ‘200자 원고지 80매 이상’의 응모 규정이 있었던 시절. 마지막으로 원고지에 글을 써서 응모를 하였던 것은 2010년 늦여름. 동아일보의 잡지, <신동아>에 논픽션 부문에 글을 보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되는 것은 100매 정도의 원고를 누런 봉투에 넣어 우체국에 가서 국제우편으로 송부하고 오던 날. 조금은 시원 섭섭했다. 결과에 상관없이, 내 인생 어느 부분의 기록이 오롯이 남아있게 된 것을 고마워했다고나 할까. 컴을 치는 일이 손으로 쓰는 것보다 훨씬 느렸던 이유로, 원고는 똑같은 걸 두벌 써서 하나는 응모를 위해 송부하고, 하나는 나의 기록으로 책상 서랍의 맨 아래쪽에 보관했었다. 아무도 찾지 못하도록 깊은 곳에 감추는 것처럼 보관했던 이유는 당선이 안되더라도, 훗날 어느 시간에 찾아보면 좋은 기억이 될 것 같아서였다.
두어 달이 지났고, 결과를 전화로 받았던 날의 흥분을 기억한다. 결과가 나오기로 돼 있던 날 늦은 저녁, 한국에서 오는 전화는 없었고, 아~ 안 됐구나 하고 있을 때. ‘여기는 동아일보사입니다. 혹, 전지은 씨 되실까요?’ 젊은 여자의 목소리에 나는 답을 못하고 우물거렸다. ‘잠시만요, 위층으로 올라가서 받을게요.’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이어갔고, 감사하게도 대상인, 최우수상이었다. 상 받으러 갈 준비를 하며 원고를 다시 꺼내 읽어 보았다. 그렇게 살아왔던 나의 이야기 인쇄가 되어 나왔다.
그때 당선 소식을 듣고 축하를 해 주었던 친구는 무조건 원고지를 사다 주었다. 선물로 받은 원고지들은 책장의 한쪽을 채우며 빈칸이 메꾸어지기를 기다렸다. 단편들을 몇 편 쓰며 원고지는 한동안 나의 좋은 벗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점점 컴으로 글을 쓰는 것이 편하게 되었고, 메모는 작은 노트를 이용하게 되었다. 메모 노트가 늘어나며 원고지는 먼지만 뒤집어 쓴 채, 주인의 손을 기다렸다. 그동안 이사를 두어 번 했고, 원고지의 자리는 자연스럽게 사라져 버렸다.
옛날 책들을 모아 놓은 차고의 한구석. 그 안에 있었던 원고지 중 한 묶음이 뚝 뛰어나와 ‘주인장, 나 여기서 아직도 기다리고 있소’하며 손을 흔든다. 먼지를 털고 소중하게 한 장씩 넘겨본다. 무엇을 쓸 것인지, 쓰기는 할 것인지 아직 결정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추운 차고의 구석자리보다는 내방의 책장 한구석이 나을 것 같아, 먼지를 털고 들여왔다. 책장의 맨 아래 칸에 놓아두며 원고지를 볼 때마다 숙제처럼 단편을 구상해 볼까? 메모 노트를 펼쳐 그 옛날에 생각해 놓은 이야기들을 이어가 볼까? 모처럼 오정희의 단편집을 들춰본다. 단편 <동경>을 읽으며 받았던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 그 설렘이 원고지 안으로 스며든다.
오랜만에 원고지를 배달해 주던 친구에게 안부전화를 해 봐야겠다. 캘리포니아의 겨울은 또 어떻게 오고 있는지?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바라다 보았던 물결의 일정한 흔들림은 또 어떻게 가고 있는지? 안개 자욱한 겨울 바다의 스산함조차, 수묵화 같은 강변의 풍경조차 원고지 안에서는 포근함이 되어 다가든다. 친구의 따뜻한 시선을 네모난 작은 칸에 채워두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