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과거는 영광의 순간도 눈이 부신 나날들도 아니었다. 그리운 추억도 아련한 기억도 없다. 그때의 나도 지금의 나도 정신병으로 고통받을 뿐, 푸른 유리창 너머의 우울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 뿐, 즐거움이란 없었다. 환희에 온몸이 절여지고 소음에 마음을 뺏겨 사는 척을 해왔는지도 모른다. 내 대학생활은 소비적이고 소모적이고 늘 그랬든 내 안의 무언가를 앗아갔다. 찬란한 순간이라 부르기엔 처절히 좌절하고 날카롭게 증오받은 기억들이 더 오래 남았다.
현실의 어려움이 없을 수 없겠으나 근근이 버티며 살기를, 화려한 명성보다는 착실한 매일에 더욱 마음 쓰며 살아가길 바란다. 어디에서든 어떤 모습이든 살고 있기를 바란다. 나에게 있어 진정함이라는 건 이 정도다. 적당히 분주하고 적당히 질박하고 적당히 사치스럽게 살아가기를.
살아간다는 건 소중한 걸 하나씩 잃어가는 과정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삶의 본질은 결핍과 상실이라고. 예전에는 인연이, 만남과 헤어짐이, 이별과 죽음이 상실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살아가면서 잃게 된 것은 철 지난 사랑도 투박한 우정도 아니었다. 나는 내 안에 있는 것들을 잃었다. 희망, 다정함, 신뢰, 열정, 무모한 기대와 끝도 없는 가능성. 그런 것들이 없는 내가 진정 살아있는 사람이라 볼 수 있는지 모르겠다.
삶에 의미 같은 건 없다. 누구도 선택해서 태어난 것이 아닌데 거창한 소명이나 가슴을 짓누르는 사명 따위 있을 리 없다. 어쩌다 보니 태어났으니 어쩌다 보니 살아가면 된다. 힘을 빼는 일이 가장 어렵다. 이대로는 살 수 없다.
수산시장 바닥에 피 흘리며 죽어가는 넙치가 떠오른다. 축축하게 젖은 콘크리트 바닥에 옆으로 누워 쉼 없이 펄떡이는 넙치. 바다로 돌아가기 위해 온몸으로 펄떡이는 넙치. 힘차게 펄떡일수록 더욱 세게 찬 바닥에 몸을 부딪히는 넙치. 넙치는 죽을 때까지 바닥에서 솟구쳐 오른다. 바다로 돌아갈 수 있든 없든, 살아있는 한 옆으로 누워 헤엄치는 게 넙치이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은 타고난 본성대로 살아간다. 결과가 어떠하든 의미가 어떠하든, 옳고 그름도 선과 악도 아니다.
인간만이 타고난 본성을 뛰어넘어 한계를 극복하고 의지로 환경을 이겨내길 강요받는다. 인간만이 위대하고 훌륭한 인간을 꿈꾼다. 넙치가 넙치이길 부정하고 바닥에 누워 헤엄치지 않으면 위대한 넙치가 되는 걸까. 콘크리트에 몸을 부딪히지 않는 똑똑한 넙치는 좋은 넙치일까 대단한 넙치일까 옳은 넙치일까.
나는 좋은 사람, 성공한 사람, 쓸모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 내 안의 나를 하나씩 비워냈다. 수박화채를 만들려고 숟가락으로 빨간 속을 긁어내듯 속까지 싹싹 긁어냈다. 그래서 지금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일하고 그러다 가끔 말아먹고 점심은 탄수화물 폭탄을 먹고 퇴근해서는 유튜브를 돌려보다 자기 전에 웹툰 몇 개를 보고 자는 아주 그럴싸한 어른이 되었다.
내가 원한 삶이 뭐였는지 좋아하는 일이 있기나 한지 모르겠다. 영화를 봐도 뭘 하든 다 남이 하는 생각을 그대로 하기 바쁘다. 나는 바닥에서 펄떡이는 넙치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좋은 넙치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