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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고래는 ( )다.

[북리뷰] 남종영 <다정한 거인>을 읽고

by 둥근네모

고래는 왜 이렇게 매력적일까. 알아갈수록 신비하고 아름다운 생물이다. 바닷속을 누비는 그 거대한 포유류에게 끌리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본능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역사 내내 고래를 궁금해하고, 가지려 하고, 망쳤던 게 아닐까. 고래의 신비함과 아름다움에 홀린 듯 이끌려서. 그들을 다치게 하는 줄 모르고. 한편으로는 알면서도.



평소 고래에 대한 다큐멘터리와 유튜브 영상을 두루 섭렵한 터라 고래에 대해 꽤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이 담고 있는 것은 지엽적인 지식 이상의 것이었다. 고래 생태에 대한 정보에 그치지 않고, 고래에 대한 인간의 인식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문명 발전의 역사와 결부시켜 보여준다. 또한 시대가 변화하며 고래에게 인간이 원하는 바가 어떻게 바뀌어 왔고, 어떤 방식으로 그들을 착취해 왔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에 대해 면밀히 짚어준다. 인간과 고래 관계의 긴 역사책이다.




먼 과거 인간에게 고래는 미지의 괴수였다. 산업혁명 시대가 도래했을 때는 기름과 고기를 내어주는 자원이었으며, 현재에 이르러서는 점차 비인간 인격체(인간은 아니지만 지성체)이자 권리의 주체로 여겨지고 있다. 고래는 인류 발전과 역사에 생각보다 훨씬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우리 삶의 모습이 달라짐에 따라 고래에 대한 인식도 계속해서 변화해 왔다. 잔혹했던 착취의 역사를 뒤로 하고 앞으로의 변화는 더 나은 것이기 위해서 우리는 고래에 대해 계속 알아가야 한다.


고래는 비단 인간뿐 아니라 지구 전체 생물들과 긴밀히 연결된 동물이다. 그 거대한 몸집과 그들이 누비는 광활한 영역만큼이나 생태계에서 큰 몫을 담당하고 있어 삶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지구 곳곳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저위도와 고위도를 넘나들며 해양 생태계의 순환을 돕고, 배설을 통해 온실가스를 가두어 심해로 내려보낸다. 죽은 뒤 해안으로 좌초되면 연안과 육지 생물들에게 먹이가 되어주고, 가라앉으면 수많은 해양생물과 심해의 미생물들을 먹여 살리며, 종내엔 플랑크톤을 풍부하게 하여 바다 생태계를 부양한다. 고래 한 마리에 기댄 목숨이 끝없다.


심해에 착륙한 고래 사체에는 대개 혐기성 생물이 모여들어 자리 잡는데, 이들을 '고래 낙하 전문종'이라고 부른다. 고래 사체에 특화된 종이 최소 100종 이상이다. (...) 고래 사체는 암흑의 바다에서 생명을 품은 우주가 된다. 지구에서 가장 큰 생명체인 대왕고래의 우주는 10년 이상 지나서야 마침내 뼈만 남게 된다. (...) 18~19세기 참혹한 포경으로, 대형 고래의 개체수 급감과 함께 상당수 고래 낙하 전문종도 함께 멸종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 p.377~p.379


미국 스탠퍼드대학교의 매튜 사보카 연구원 등은 2021년 과학전문지 <네이처>에서 고래의 개체수 감소로 인해 늘어난 탄소 배출량을 분석했다. 남극해 서식 대형고래 4종을 대상으로 '고래 펌프'에 의한 탄소 감축 기여량을 추정했더니, 한해 2,200만 톤의 탄소가 해저에 고정된다는 계산이 나왔다. (...) 이는 곧 인간이 대형 고래 4종을 사냥하지 않아 기존의 개체수가 유지됐다면, 매년 2억 2,000만 톤가량의 탄소를 상쇄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만약 우리가 노력하여 남극해 고래 4종의 개체수를 포경시대 이전으로 복원하면, 온실가스 7억 2,468만 톤(이산화탄소 환산량)을 추가적으로 감축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화력발전소 290기가 일 년 동안 배출하는 온실가스에 해당하는 양으로, 남극의 고래를 보호하는 것만으로도 한국의 연간 배출량(6억 7,600만 톤)보다도 많은 온실가스를 줄일 수 있다는 뜻이다. (...) 고래 개체수가 회복되면 고래 낙하를 통해 연간 약 29만 5,000 톤의 탄소를 추가로 해저에 격리할 수 있다고 봤다. (...) 추정치가 실제 양보다 적으면 적었지 많지는 않을 거라고 말한다. -p.383~384


인간은 고래를 학살함으로써 고래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고래와 이어져있는 수많은 목숨들까지 죽인 셈이다. 이런 류의 책(동물권에 대해 다루는 책)을 읽다 보면 여지없이 인간이 싫어진다. 인간은 똑똑한 체하지만 제일 멍청한 종이다. 어쩌면 고도한 지능 발달의 부작용으로 중요한 본능, 즉 주변 생태계와 공존하는 법을 잊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인간임이 싫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인간으로부터 고래를 보호할 수 있는 것도 인간뿐이다. 고래는 인간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다. 우리보다 약해서가 아니라 생태계의 일원으로서 우리보다 더 나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 소득 없이 인간 혐오를 되뇌기보다 고래에 대해 정확히 알고, 그들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을 실천해야 옳겠다. 인간은 적어도 타자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종이다. 그러니 고래에 대해 아는 것은 곧 그들을 우리 공감의 대상으로 끌어오는 것이며, 그러한 인식의 확장은 인간으로부터 고래를 보호하는 수단이 될 것이다.


책을 읽으며 영화 '아바타'가 생각나는 대목이 많았다. 아름다운 그래픽으로 유명세를 탔지만 사실 타 문명에 대한 착취를 다룬 그 영화 속에서도 인간은 판도라 행성의 고래들을 학살했다. 과거 기름을 얻기 위해 거대한 향고래의 몸에 작살을 꽂았듯이 미량의 척수액을 뽑겠다며 그 외계 고래들을 죽였다. 절대 공격하지 않는다는 우아한 미지의 지성체들을 알아가기를 포기한 채. 그들의 고통에 눈 감은 채로. 영화 속 잔인한 학살의 모습이 실제 역사를 빗댄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책에서는 개체로서의 고래를 다루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높은 지능과 사회성을 가진 만큼 고래의 삶은 다면적이고 복합적이어서 결코 고래라는 종의 본능과 습성으로만 설명될 수 없다. 그래서 고래 연구가 더 힘든 것이 아닐까? 고래가 수면 위로 뛰어오를 때, 그것은 피부의 각질을 탈락시키려는 행동이거나 힘을 과시하는 행동, 구애하는 행동일 수도 있지만 그저 단순히 재미를 위한 것일 수도 있고, 그 개체의 개성일 수도 있고, 심지어는 아무런 이유가 없을 수도 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이 언제나 생존과 연관된 이유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이 책에서는 여러 다양한 고래 개체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수족관에 갇혀 고통받았던 고래, 인간과 교류하는 고래, 인간에게 개인적인 호기심을 갖는 고래, 심지어는 대를 이어 서로 소통해 온 인간과 고래 집단도 있다. 고래가 '고래'라는 종으로서만 나오지 않고 개체로서의 이야기도 나오는 점이 좋았다. 우리가 그들을 궁금해하듯 우리에게 호기심을 갖는 고래를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다른 존재와의 교감보다 설레는 것이 있을까. 종과 언어를 뛰어넘어 서로에 대한 호의를 확인하는 것만큼 아름다운 일이 있을까.


브라질 남부 산타 카타리나 주의 소도시 라구나. (...) 이들 큰돌고래는 어부들과 함께 물고기를 잡는다. 인간과 돌고래의 공동어업은 이 마을의 일상적인 풍경이다. 100여 가구가 공동어업에 참여하고 있으며, (...) 역사도 오래됐다. 한 어부가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지금과 같은 돌고래와 함께 고기를 낚았다고 했고, 그의 말을 증명하듯 1847년의 마을 기록에도 공동어업 사실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 돌고래는 어부들의 대열 5~7미터 앞에서 몸통을 휘둘러 잠수하고 (...) 어부들은 돌고래의 신호에 따라 그물을 던진다. (...) 물속에 선 어민들은 돌고래가 보내는 초음파를 느끼고, 둘은 타이밍을 맞춰 움직인다. 공동어업에 참여하는 돌고래는 대략 60마리가량인데, (...) 공동어업에 참여하지 않는 돌고래도 있는데, 어부들은 이들을 '나쁜 돌고래'라는 뜻의 '루임 ruim'이라고 부른다. (...) 라구나 돌고래의 고기잡이에는 보통 새끼 돌고래들도 따라 나온다. 새끼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어미를 따라다닌다. (...) 나중에는 혼자서 숭어를 몬다. 일종의 학습이 이뤄지는 것이다. 공동어업에 새로 가담하는 돌고래는 대부분 과거 어미를 따라다니던 개체들이었다. (...) 이는 돌고래들 각자가 자신의 이유에 따라 특정의 생활방식을 선택한다는 것, 그리고 대를 거쳐 전승한다는 것, 돌고래가 문화를 가지고 전수하고 있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p.89~92


남방큰돌고래는 몽키마이어 해변으로 인간을 만나러 온다. 오랜 전통에 따라 오전 8시에 '먹이 주기' 의식이 치러진다. (...) 짧게는 몇 분에서 길게는 서너 시간 동안 생선을 받아먹고 사람과 어울리다가 바다로 돌아간다. (...) 1964년 한 어부가 돌고래에게 생선을 주면서, 돌고래들에게 어떤 '문화'가 생겼다. (...) 재미있는 점은 돌고래가 무작위로 찾아오는 게 아니라 특정한 부류가 찾아온다는 거다. 샤크베이의 남방큰돌고래는 약 3,000마리. 이 가운데 몽키마이어 해변에 찾아오는 돌고래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새끼들은 어미를 따라와 인간을 만난다. 가끔씩 친구가 따라오기도 한다. 단순히 먹이 때문에 돌고래가 이 해변에 방문하는 것은 아니다. (...) 생선은 암컷 네 마리(서프라이즈, 퍽, 피콜로, 쇼크)에게만 하루에 딱 6~8마리만 지급됐다. (...) 그래도 돌고래는 인간을 보러 온다. 돌고래에 따라오는 날도 있고, 안 오는 날도 있다. 돌고래 '퍽'은 자주 오긴 하지만, 생선은 잘 안 먹는다. 친구를 따라온 돌고래들은 해변에 가봤자 먹이를 먹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온다. 인간과 놀기 위해서다. 그게 이들의 문화가 되었다. -p.92~93


제돌이, 춘삼이, 삼팔이, 태산이, 복순이. 다섯 돌고래는 제주 바다로 돌아가 행복하게 살고 있다. 삼팔이는 2016년 4월 새끼를 데리고 다니는 모습이 목격됐다. 세계 최초로 쇼돌고래가 야생에 돌아가 생명을 출산한, 기적 같은 일이었다. 넉 달 뒤 춘삼이도 출산 소식을 보내왔다. 무엇보다 기분 좋은 소식은 2018년 복순이가 건강하게 새끼를 낳아 기르고 있다는 것이다. (...) 무엇보다 감금 상태에서 연거푸 사산했던 복순이가 야생에 나가 출산에 성공한 사건은 수족관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곳인지 직관적으로 알려준다. -p.354


아일랜드 남부의 시골 도시 딩글. 펑기가 작은 항구에 찾아온 건 1983년이었다. (...) 어쨌든 이 돌고래는 딩글 앞바다를 떠나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났고, 일 년이 지나고, 심지어 30년이 지났는데도. 이게 왜 이상한 일이냐면, 큰돌고래는 무리를 이뤄 살며, 한 곳에 정주하지 않기 때문이다. (...) 배가 나가자마자 먼바다에서 펑기가 접근했다. (...) 숨은그림찾기 같은 '고래관광'이 아니었다. 펑기는 사람에게 '달라붙었'다. 연유는 모르겠으나, 사람 옆에 있는 걸 즐기는 듯했다. 그의 이름이 '펑기'라고 붙은 이유도 언제나 사람을 즐겁게 마중 나오고 따라다녔기 때문이다(fun guy=Fungle). (...) 동족이 아닌 사람을 친구로 택한 돌고래다. 사람이 먹이를 줘서 유인하거나 일부러 가둔 것도 아니다. 첫 접촉 이후 인간과의 상호작용이 영향을 끼쳤겠지만, 돌고래의 '자유의지'가 특별한 삶을 선택하게 한 가장 큰 요인이다. -p.365~366


지구 생태계의 구성원은 자기 삶의 주인으로서 그리고 지구의 일부로서 산다. 전체로서의 삶과 개체로서의 삶이다. 고래도 마찬가지다. 고래는 온실가스를 격리하고 저장하여 생태계에 기여한다. 동시에 고래는 합창하고 도구를 발명하고 인간에게 놀러 가는 개채적 삶을 산다. 우리는 고래의 종 보전과 고래 개체의 권리, 즉 종과 개체 두 측면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p.412


고래의 문화와 그들 개체의 다양성을 알아갈수록 그들이 우리와 동등한 지성체임을 느끼게 된다. 그들과 우리의 차이는 그들이 우리와 달리 이 지구에 어울려 살아갈 줄 안다는 것뿐이다.


전 세계적인 거대 산업이었던 포경 산업이 저물었던 것은 우리가 뭔가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산업의 형태가 변화하며 죽은 고래보다 산 고래가 더 돈이 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필요가 떨어지자 비로소 탐욕으로 멀었던 눈을 뜨고 그제야 고래의 고통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전후 관계가 반대인 셈이다.


이제는 또 한 번 시대가 변하고 있다. 막연했던 기후변화가 실체를 가진 위기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우리는 이제 생존을 위해서 우리가 망친 생태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 그리고 '고래 보호'는 그 첫 발자국으로 이상적인 행보다. 과거에 고래가 '미지의 괴수'였다가 '자원'이 되고 '구경거리'가 되었듯이, 앞으로는 또다른 무언가가 될 것이다. 그 빈 괄호가 이제는 이 지구를 함께 살아가는 이웃인 '다정한 거인'이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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