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보러 온 거 아닙니까?”
수화기 너머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 그 새끼 목소리다. 현우는 벌떡 일어나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뛰었다. 점점 윤곽이 보였다. 호리호리하다. 어두운 색 정장. 얼굴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패거리가 있을 줄 알았는데 혼자다. 보육원에서 싸움 좀 하던 현우였다. 매번 원장에게 불려 가 손 들고 벌을 서야 했지만, 덕분에 보육원 내에서 현우에게 덤비는 놈은 한 명도 없었다. 너도 내 주먹에 나가떨어지게 해 주마. 오기를 넘어 독기까지 오른다.
“네가 뭔데 뛰어내리라 마라야? 너 어디 소속이야?”
싸움은 기선 제압이 제일 중요하다. 현우는 큰 소리로 상대를 노려보며 말했다.
“나? 하늘!”
“이 새끼가 뭐라 그러는 거야. 미쳐버리겠네. 하다 하다 또라이까지 엮이네, 이놈의 인생은.”
“2004년생 이현우, 아니지. 2004년생 본명 하우진!”
현우는 눈이 동그래졌다.
“무슨 개소리야? 허튼 수작하지 마!”
“네 본명은 하우진! 하민준과 김미경이란 부모에게서 태어났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나는 부모가 없어. 태어나자마자 버려졌다고.”
“버려졌지. 버려진 건 맞아. 그런데, 부모는 있어. 심지어, 둘 다 살아 있고 말이야. 너만 원한다면 다시 버려지지 않은 네 인생으로 살아볼 수 있어. 내가 돌려줄 수 있거든.”
현우는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내 인생을 돌려준다니, 얼토당토않은 말이다.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네깟 게 뭔데 내 인생을 돌려준다는 거야? 이십 년이나 지난 일이야. 이제 와서 내가 그들에게 간들 받아줄 거나 같아? 또다시 버려지고 말 거야. 보육원에서도 결국 난 버려졌어. 그냥 뛰어내리면 끝나는 거라고.”
“그런데 왜 여기 있지?”
“이 자식이, 진짜. 돌아버리겠네. 네가 오라며? 택시까지 보냈잖아.”
“아, 그 택시 네가 부른 거야. 네 마음이. 나는 그 비용을 냈을 뿐, 전화기를 잡는 순간 너는 죽고 싶지 않았어. 간절히 말이지.”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집에 유서까지 써 놓고 왔다고. 죽는 거 따위 두렵지 않아!”
“생살 찢는 건 두렵고, 죽는 건 두렵지 않다? 우습군.”
‘내 생각도 내 감정도 다 읽고 있다.’ 현우는 바짝 정신을 차렸다. 도깨비 아니면 미친놈이다. 놀아나면 안 되겠다 싶어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
“좋아, 그렇다 쳐. 내 인생을 어떻게 돌려준다는 거야?”
“너는 버려지지 않은 채 살고 있고, 지금과 비슷한 나이의 언젠가로 돌아가게 될 거야. 네가 자란 그 환경은 오롯이 네가 받아들여야 해. 버려지는 게 나았을지, 부모와 함께 사는 게 나았을지. 그리고, 이현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네가 존재했었다는 건 네 팔목에 흔적으로만 남게 돼. 돌아가면 열심히 살겠다는 약속의 증표로. 죽기로 마음먹었다가 다시 기회를 얻었는데 열심히 살아야 하지 않겠어?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게 돼. 선택은 네 몫이야. 지금이라도 한강 다리로 돌아갈 수도 있어. 그리고, 다시 살아 볼 기회를 얻을 수도 있지. 물론, 기회일지 후회일지 그것도 너 하기 나름이겠지만 말이야. 단, 후자를 선택한다면 번복하는 삶이니만큼 엄청난 책임이 따른다는 것. 감내할 자신이 있으면 기회를 줄게.”
현우는 한참을 망설였다. 분명 한두 시간 전, 소주 한 병을 다 비워냈을 때는 세상에 아무런 미련도 없었다. 하지만, 내 부모의 존재를 들었다. 그들의 이름과 내 본명까지. 살고 싶었다. 다시 한번 살아보고 싶었다. 미친놈의 개소리일지언정 하루만이라도 부모와 살아보고 싶었다. 그게 만약 꿈이더라도 말이다. 독기는 간절함이 되어 현우의 목소리를 타고 흘렀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건 무슨 의미죠?”
“그건 네가 찾아야지. 인생마다 그 의미가 다 다르니까. 느끼는 무게도 다 달라. 지금의 너도 열심히 살 수 있었는데 포기해 버렸잖아. 너보다 힘든 상황에서도 악착같이 살아내는 사람들도 많은데 말이지. 다시 돌아간다고 더 나아진다는 보장은 없어. 네가 열심히 살수록 네 팔목의 흔적은 서서히 없어질 거고, 그렇지 않으면, 매일 고통에 시달리겠지. 열심히 산다는 게 정의로운 일일 수도, 남을 해치는 일일 수도 있어. 그것 역시 네가 선택할 문제야. 네 인생이니까. 그 이상은 말해줄 수 없어.”
현우는 어차피 죽으려고 했던 마당에 다시 살아보고, 아니다 싶으면 다시 죽어도 그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가 있으니, 지금보다 분명 나을 것이다. 양손을 모으고 현우는 그 검은 사나이에게 간절하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되죠?”
그는 움직이지 말라는 말과 함께 조용히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댔다. 그와 동시에 현우는 몸이 공중에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잠이 와서 그런가 싶어 눈을 비벼 보았지만, 몸은 뿌옇게 변하며 끝자락부터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살아온 이십 년이 되감기 버튼을 누른 듯 눈앞에서 펼쳐졌다. 마포대교, 유나의 장례식, 집을 구하고, 보육원에서 퇴소하고, 원장한테 혼나고, 그리고, 기억나지 않는 수많은 유년 시절을 흐릿하게 지나 마지막 한 장면에서 툭 멈췄다. 교회 베이비박스 옆에 갓난아이를 안은 여자가 서 있고, 담벼락에 걸린 시계는 새벽 5시를 가리키고 있다. 그렇게, 이현우는 세상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