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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도덕적인 사람

[독서와 생각 Ⅲ]

by trustwons


2. 도덕적인 사람


도덕적으로 뛰어난 모든 사람들은 동일한 생명체들에 대한 심원(心願)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행복만이 아니라 후자의 행복도 동시에 추구한다. 즐거움에 대한 우리의 갈망은 확실히 우리로 하여금 열등한 감각적 쾌락에 탐닉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와 같이 하도록 권유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스스로가 필연적으로 고통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나를 찾아가는 길/ 그림 지음/ 김형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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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서는 도덕성을 매우 위선적으로 인식하게 말한다. 이는 도덕적인 인간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의 인격체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격체는 유일하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 형상대로 만드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인간의 인격체는 유일하다.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인격적인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도덕적으로도 손색없는 인격을 갖춰야 한다.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도 도덕적인 인간이 되려고 한다. 그런 도덕적인 인간에게는 심원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깨닫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절대로 선행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도덕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하는 사람이다.



<회고(回顧)>

얼마나 인간이 간사한지를 인간세상에서 살아온 사람이라면 공감을 할 것이다. 가끔 어린이들을 바라볼 때에 하나님의 형상을 엿볼 수가 있다. 그들은 아직 세상의 어떤 지식이나 사상으로 채워져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순결한 어린이들을 어른들은 어찌 보는가? 아직 미숙해서 인간이 덜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러면서 어른들의 불순한 생각들, 이념이나 사상들로 지식교육을 하려고 하지 않는가?

오늘날의 교육의 제도화를 이끌어간 인간들은 누구일까? 아마도 그들은, 공자, 존듀이, 교육자, 페스탈로치 등.......

공자는 ‘學而不思則網 思而不學則殆’(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 -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을 것이 없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라고 말했다.

존듀이는 교육은 지식 전달을 넘어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키우는 과정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베르게리우스는 자유인이 받아야 할 교육은 학생의 개인적인 성향과 연령에 맞게 조절되어야 하며, 원만한 전인적인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스스로 알고 있다고 하는 인간들은 자신을 지식인으로 칭하고는 그 외의 사람들은 미숙하다고, 아직 성숙하지 못하다고....... 즉 인본주의적인 의식을 소유한 인간들이다.

그들은 마치 인간사회를 구성하는 데에 있어서는 규격이 필요하다고(본인을 제외한),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자칭 지식인이라고 하는 인간들의 공통점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해 부정하는 편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다. 즉 성경에서 말하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였다고 명시하고 있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마치 그러한 것은 미개인들의 소행(所行)에 해당된다고 하면서 그러한 인간들을 경멸하는 태도를 갖고 있다.

그러다보니, 기독교계에서는 인간의 도덕성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게 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인간들에게는 창조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라고 선을 긋고 있는 것이다. 즉 이 세상은 타락한 세상이기에 인간의 죄성(罪性)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 인간의 원죄(原罪)로 모든 인간은 태어나기 전부터 죄를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하니 인간의 도덕성, 도덕적인 인간에게는 전적으로 선하지 못하다는 전제(前提)를 깔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원죄를 주장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즉 이미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원죄가 있다는 것에는 잠시 생각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창조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에 하신 말씀의 의미가 희석되어짐을 말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6)

이 말씀의 뜻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신앙의 방향이 다를 수가 있겠다. 즉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깊이가 달라질 수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고 믿느냐를 돌아보아야할 것 같다.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마태13:13)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마가4:11,12)


예수가 비유를 들어 가르침에 제자들이 물으니, 택함을 받은 자와 택함을 받지 아니한 자를, 즉 너희들에게는 비유에 대하여는 설명하시나, 저희들에게는 비유로 감추신 이유를 말씀하셨다.

그럼,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 태어나는 어린이들에게는 그 형상을 가졌다는 것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인간의 원죄는 모순이 된다. 아니 원죄에 대해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믿음의 방향이 크게 달라진다는 것이다. 인간이 원죄를 갖고 태어난다고 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의 상실을 인정하게 된다. 반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간이 태어났다면, 원죄는 후천적(後天的)인 것이라고 보아야 된다. 즉 첫 아담의 유전적 죄성으로 말미암아 죄를 짓기도 하거나 짓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인간에게만 있는 자유의지에 대해 이해할 수가 있겠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간섭하지 아니하신다. 그런데 인간은, 이미 죄성으로 채워진 죄악들로 인해 타인의 자유의지를 얼마나 간섭하고 파괴하려고 하지 않는가?

특히 갓 태어난 어린이에게 인간세계, 인간문명의 산물인 인본주의적인 교육을 가르치고 강요하지 않는가? 그들이 말하는 교육의 필요성은 무엇이겠는가? 인간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러할지라도 선한 성품을 지닌 사람에게는, 대부분의 인간들은 이러한 선악의 갈등을 하고 있지 않는가?

인간 세상을 보면, 선악의 갈등으로 고민하고 괴로워하지 않는가?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인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아니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여전히 인간세상을 주관하시며 은혜를 베푸시고 계신 것이다. 왜 하나님은 이처럼 악한 인간세상을 외면하지도 멸하지도 아니하실까? 그 예로써 성경에는 말해주고 있다. 즉 소돔 고모라의 멸망 직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했다. 그때에 아브라함은 의인과 악인을 함께 멸하시는지에 대해 물었다. 그 성중에 의인이 오십, 사십오, 사십, 삼십, 이십, 십 인이 있다면 멸하실 것인지 물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세상을 의인 때문에 은혜를 베푸시며 기다리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창세전부터 이미 예정된 메시아, 그리스도,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실 때에 하신 말씀에도 알게 된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 이유를 말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요한3:16)

하나님이 인간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아브라함과 대화한 것과 같이, 이 세상에는 선한 자와 악한 자가 있기 때문에 은혜를 베푸심을 말이다. 또한 예수가 천국에 대한 비유로 말씀하신, 좋은 씨를 밭에 뿌린 비유에서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자 종들이 주인에게 말하며 가라지를 뽑기를 원하신지 묻자, 주인은 가만 두어라 했다. 이 말씀을 이해할까?

그러므로 인간 세상에는 선한 자와 악한 자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중에 도덕적인 사람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도덕적인 사람은 어떤 마음을 가졌을까? 이에 대해, 저자 그림의 ‘나를 찾아가는 길’에서는 도덕적인 사람은 심원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심원한 사랑’이란 무슨 뜻일까? 모든 사람들, 생명체, 이들에게는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씨가 있다는 것이다. 대자연을 바라보아도, 사람들의 모습들에서도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씨, 심원한 사랑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덕적인 사람은 그러한 눈으로 보기 때문에 자신들만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행복하기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도덕적인 사람이라면 비록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의 씨를 품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물론 일부 위선적인 도덕관을 가진 인간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도덕적인 사람들을 다 몰아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 즉 은혜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진정 하나님을 안다면, 그를 믿는 사람이라면,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 사람보다 더 도덕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비도덕적인 그리스도인? 뭔가 모순되지 않는가? 아마도 그런 사람은 가라지에 속한 자들일 것이다.

따라서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도덕적인 사람이 되어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진리를 모순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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