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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의 기적을 믿지 못하는 이에게

by 노인영

오래전 일이다. 소망하던 대학에 입학한 딸이 집에 와 오리엔테이션 때 학교 선배가 해준 말을 들려주었다. “이제부터 너희들의 재능을 의심하는 이는 없다. 따라서 앞으로 너희 인생은 각자 태도에 달렸다.” 20대 약관의 선배 말이 신통했다. 그리고 그의 말에 감동한 딸도 기특했다. 딸은 늘 주변 사람에게 따뜻했고, 지금은 미국에서 무탈하게 잘 지내고 있다.

그럼, 인간의 태도를 결정짓는 많은 덕목 중 무엇이 으뜸일까? 노력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큰 차이를 가져오는 덕목, '친절'이다. ≪멋진 신세계(1932)≫를 쓴 영국의 소설가이자 비평가 올더스 헉슬리는 인간과 우주, 그리고 이를 통해 삶의 본질을 규명하는데 평생 충실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45년 공부 뒤에 얻은 다소 당혹스러운 결론으로,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상의 조언은 ‘서로에게 조금 더 친절하라’는 것이다.”


* 사진 설명: 이집트 나일강 여행에서 만난 압둘 아만. 밤 늦게까지 축구로 한마음이 되어 이야기 꽃을 피웠는데 이튿날 새벽, 선상에 나온 나를 발견하고 커피 한 잔을 내왔다. 그 따뜻한 온기는 지금도 사라지지 않는다.



귀스타브 쿠르베의 <안녕하세요, 쿠르베 씨!(1854)>

사실주의 화가 쿠르베가 작품명에 자기 이름을 넣고 직접 캔버스 안으로 들어왔다. 1854년 5월, 그는 남프랑스 몽펠리 들판 한가운데서 후원자 알프레드 브뤼야스를 만났다. 오른쪽 화구를 얹어 무거울 것 같은 배낭을 메고, 나무 지팡이를 손에 쥔 인물이 쿠르베다. 먼 길 오느라 피곤할 법도 한데 그의 허리는 꼿꼿하다. 하인 칼라와 개와 함께 마중 나온 브뤼야스가 멀리 마차에서 내려 모자를 벗고 화가에게 다가와 먼저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쿠르베 씨!"


쿠르베는 부(富) 앞에서 고개 숙이지 않는 예술가의 당당한 모습을 표현했다. 그래서 ‘천재에게 경의를 표하는 부’라는 부제를 붙였다. 그러나 오만해 보인다. 평론가들도 쿠르베의 태도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브뤼야스는 쿠베르를 믿고 아낌없이 후원했던 인물이다. 그가 산 많은 작품 중에는 당시 커다란 스캔들을 일으켰던 <목욕하는 사람(1853)>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그림에 관한 세간의 평가에 마음이 흔들렸다. 이후 브뤼야스는 쿠르베가 관전(官展)에 저항하여 세계 최초로 개최한 개인전의 지원 요청을 거절했다. 결국, 두 사람은 2년 후 안타깝게 결별했다. 쿠르베는 방돔 광장 조형물 파괴와 관련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스위스로 망명, 그곳에서 사망하는 과정에서도 브뤼야스의 도움을 구하지 못했다. 서른다섯 살 쿠르베는 소신을 지켰다. 하지만 친절을 빠트렸다.



친절은 전쟁 중에도 발견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가스실로 들어가기 전 먹다 남은 빵을 남아있는 동료들에게 나누어 주는 유대인이 있었다. 증오하는 독일군 포로에게 욕을 하면서도 빵과 귀리죽을 나누어 주는 러시아군 병사에게도 친절은 존재했다. 랍비들은 친절이 자선보다 세 가지 면에서 더 위대하다고 가르친다.

첫째, 자선은 금전적으로 행해지지만, 친절은 금전적으로 행할 수도 있고 몸소 행할 수도 있다. (문병)

둘째, 자선은 가난한 사람에게만 베풀 수 있지만, 친절은 가난한 사람과 부자 모두에게 베풀 수 있다. (위로)

셋째, 자선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만 할 수 있지만, 친절은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 모두에게 베풀 수 있다. (안장해 주는 것)


그래도 여전히 친절의 가치를 믿지 못하는 이를 위해 야파 엘리야크의 ≪대학살 이후 하디시즘 유대인 이야기≫에 실린 글을 소개한다. 친절이 생명을 구한 사례다.

1930년대 폴란드 발트해 연안 항구도시 단치히에 사는 한 랍비는 매일 아침 산책을 했다. 만나는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그는 근교 농장에 사는 농부와 종종 마주치곤 했다. 그때마다 “좋은 아침이에요. 뮐러 씨!”라고 인사를 했다. 그러면, 농부가 답례를 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랍비님.”

랍비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산책이 중단되었다. 그리고 트레블랑카 수용소에서 가족을 잃고,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다. 어느 날 유대인 선별 작업이 이루어졌다. 왼편은 가스실로, 오른편은 강제노역으로.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긴박한 순간이었다.

그런데 앞의 줄이 줄어들면서 왼편, 오른편을 지시하는 장교의 목소리가 어딘지 낯익었다. 마침내 장교 앞에 서게 되자, 그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입니다. 뮐러 씨!” 장교는 랍비를 쳐다보았다.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려 ‘걸어 다니는 해골’의 모습이었다. 장교는 답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랍비님.” 이어 희미하게 웃는 랍비를 보며 뮐러는 지시했다.


“오른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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