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해랑열차를 타고 2박 3일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 열차에서 숙박하며, 국내 대표 관광지를 둘러보고, 맛있는 향토 음식을 먹는 격조 높은 여행이었다. 모두 가족 단위로 참여했다. 그중 아흔여섯 살 할머니를 모시고 온 삼대 여성분들이 보기 좋았다. 막내딸이 어머니를 소개하면서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가족 여행이라며 눈시울을 적셨다. 덩달아 내 가슴도 뜨겁게 달아오르면서 먹먹해졌다.
2일 차에 부산 기전역에 도착했다. 일행이 준비된 관광버스에 오르자, 토박이 가이드가 합류했다. 그는 부산의 옛 모습과 오늘을 비교하면서 구수하게 이야기를 풀어갔다. 동백섬 산책 도중, 소나무에 대한 그의 설명이 신박했다.
그는 동백섬임에도 동백나무가 울창하지 못한 배경에 소나무가 있다고 했다. 소나무 솔이 독성을 뿜어내 자기 영역 내 다른 식물의 서식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파른 산을 깎아 길을 냈는데, 졸지에 위쪽 가장자리로 밀린 소나무는 아래 산책길 방향으로 가지를 뻗지 않는다고도 했다. 몸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일까? 어쨌든 식물에도 의식이 있다는 발상이었다.
화가들은 오랫동안 식물을 그림의 배경으로만 대했다. 동물 역시 그러했거늘 새삼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런데 화가 중 제일 먼저, 그것도 하찮은 잡초를 주인공으로 그린 인물이 있다. 르네상스 시대 독일 화가 뒤러이다. 그는 곤충의 시선에서 <큰 잡초 덤불>을 그렸다. 그가 위대한 예술가로 우뚝 선 배경 중 하나이다.
신성로마제국의 궁정화가 주세페 아르침볼도가 매우 재미있는 시도를 했다. 사계절 각각의 절기에 맞는 각종 식물을 조합하여 유쾌하게 사람 이미지를 창조했다. 마침내 그는 ‘계절의 신’ <베르툼누스>를 완성했다. 마치 '예술을 사랑한 통치자' 황제 루돌프 2세를 닮았다. 이러니 식물도 생각할 줄 아는 인간처럼 보인다.
초기 지구의 대기 주성분은 질소와 이산화탄소였다. 이때 산소는 없거나, 있어도 초기 생명체에게는 치명적인 물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수십억 년 전 남세균이 공급했던 산소는 지금 대류권에서 약 21퍼센트를 차지한다. 식물이 광합성이라는 혁명적 방법을 고안해 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산소로 생육하는 호기성 동물이 탄생했다. 인간 역시 호기성 동물이다. 그러나 감사는커녕 식물을 생명체로 예우하지 않는다.
사실 식물은 동물보다 더 오랜 진화의 역사를 가졌다. 식물은 진핵세포이자, 다세포 생명체다. 유전물질이 기본적으로 핵 안에 존재하며, 세포와 세포 사이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한 곳에 고정된 식물은 세포 수준에서 물리·화학적 보호막을 만들고, 이웃 나무에 위험을 경고하는 화학적 신호를 보낸다. 그러나 옥스퍼드대학교 생물학 교수인 팀 콜슨조차 식물엔 의식이 없으며, 환경의 신호에 반응할 뿐이라고 단언한다. 과연 그의 생각이 정답일까?
지금으로부터 약 1억 6,000만 년 전 쥐라기 말부터 식물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꽃을 피운 뒤 씨를 안으로 맺는 속씨식물의 등장이다. 속씨식물은 오늘날 전체 식물의 약 90%를 차지한다. 이 갑작스러운 사건을 일러 찰스 다윈은 '지독한 신비'라고 했다.
열매가 성숙해지면, 나무의 꽃은 오렌지색이나 빨간색을 띤다. 동물의 눈에 잘 띄는 원초적인 색깔이며, 열매를 수확하라는 신호탄이다. 그리고 열매에는 단백질과 함께 당분을 함유한다. 따라서 꽃이 핀 위치를 잘 기억하는 동물은 상대적으로 생존력이 뛰어나다. 이를 일러 공진화(共進化)라 한다.
그런데 소나무를 비롯하여 대다수 나무 종은 근처에 자기 씨앗이 발아하는 것을 기피한다. 공동의 자양분을 두고 부모, 자식 간 서로 경쟁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번식과 생존을 위해서 씨앗의 공간 이동이 필수적이다. 자작나무는 바람을 이용한다. 씨앗의 길이가 1~2밀리미터, 무게는 1그램도 되지 않아 바람이 불면 수 킬로미터를 날아갈 수 있다.
대다수 식물은 특정한 곤충이나 새의 시각, 후각, 촉각을 자극한다. ≪욕망하는 식물≫은 마이클 폴란을 일약 문제적 저술가로 부상시킨 작품이다. 범상치 않은 제목처럼 책에서 그는 식물의 욕망을 열거했다.
어떤 낭상엽 식물은 파리를 잡아먹으려고 냄새까지 썩은 고기로 위장한다.
오프리스 난초는 암컷 곤충의 뒷모습을 닮은 꽃을 피워 '매춘란'이라 부른다.
루고사스와 티 같은 장미는 일본 딱정벌레에게 배를 채워주고, 자기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교미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원추리는 깊숙이 들어와 꿀을 실컷 먹고 나가는 작은 말벌에게 꽃가루를 흠뻑 뒤집어씌운다.
한편 참나무 처지에서 보면, 다람쥐는 매우 훌륭한 동반자이다. 다람쥐가 대개 네 번째 저장 장소를 잊어버리기 때문에 번식에 유용하다. 따라서 참나무는 인류와 타협할 까닭이 없으며, 인간이 싫어하는 도토리의 씁쓸한 타닌 맛을 제거하려고 힘을 쓰지 않는다.
추위가 가시지 않은 초봄에 꽃을 피우는 잡초는 벌보다 낮은 기온에서 활동하는 등에의 도움이 절실하다. 그러나 등에는 벌과 달리 종을 가리지 않고 꽃가루를 나른다. 소모적이다. 등에의 습성을 바꿀 수는 없는 법, 그래서 잡초는 넓은 지역에 걸쳐 서로 모여서 꽃을 피운다. 환경의 신호에 단순히 반응한다고 단언하기에는 너무도 전략적이다.
인류는 팀 콜슨처럼 몸속에 뇌와 같은 기관이 있어야 의식 작용이 가능하리라 예단한다. 하지만, 이것은 동물 혹은 인간의 관점이다. 우리는 지식이 늘어날수록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고, 인간이 만물을 다스리도록 설계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공감한다.
오늘 식물이 공간 이동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스스로 성장, 번식할 수 있는 훌륭한 독립영양체라는 점을 강조했다. 창밖으로 저무는 단풍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으리라. 이제 식물은 추위에 대비하면서 다가오는 봄에 싹 피울 준비를 지금부터 서두를 것이다. 이번 기회에 식물에 대한 인식 변화와 함께 좀 더 겸손해지는 인류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