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탄재를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자신의 몸뚱아리를
다 태우며 뜨끈뜨끈한
아랫목을 만들던
저 연탄재를
누가 함부로 발로 찰 수 있는가?
자신의 목숨을 다 버리고
이제 하얀 껍데기만 남아 있는
저 연탄재를
누가 함부로 발길질을 할 수 있는가?
안도현의 시 <너에게 묻는다>이다. 시의 소재 연탄재에서 나는 대한민국 노인을 떠올렸다. 그들은 산업화와 민주주의라는 두 가지 국가 목표를 성공적으로 끌어냈다. 하지만 그 자부심으로 인해 지금 노인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선뜻 내딛지 못하고 주춤거린다. 위대한 운명에 대한 의무감을 버려야 비로소 일상의 참 맛을 느낄 수 있는데···.
손녀인 듯하다. 아이는 손을 뻗어 할아버지 귀에 소라껍데기를 가져간다. 그리고 묻는다. “할아버지! 소라가 뭐라고 해요?” 우와! 이쁜 것. 진짜 궁금해서일 수 있고, 자기 생각을 확인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맑은 질문이다.
할아버지는 무릎을 굽히고, 두 팔로 세월의 무게를 감당한다. 그리곤 손녀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정성을 다해 어두워진 귀를 기울인다. 이제, 할아버지의 대답은 적어도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는 아닐 것이다. 미국의 대표적 풍속화가 이스트먼 존슨의 <소라가 뭐라고 해요?>이다.
보통 예순다섯 살쯤 되면, 근지구력이 거의 3분의 1, 근력은 거의 60퍼센트가량 약해진다. 마치 그림 속 노인처럼 높은음 듣기도 어려워져 거꾸로 자기 목소리를 높인다. 그럼, 주위가 불편해진다. 젊은이가 대화를 기피한다.
물론 노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도서관을 갖고 있다는 점은 동의한다. 나름 젊은이에게 전수해 줄 과거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문제는 다수가 이제까지 자신이 경험한 것이 젊은이들이 따라야 할 올바른 길이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단언컨대 환상이다. 그런 논리라면, 역사는 언제나 똑같은 답을 반복했을 것이다. 언제나 적용되는 올바른 답은 없다.
젊은이를 다시 한번 끌어당기려면, 먼저 자기 목소리를 낮추어야 한다. 그럼, 상대방이 소리를 키운다. 그리고 지속해서 힘을 다듬어야 한다. 그래야 조언을 구해오는 청년에게 뻔히 예상한 답이 아니라 영감을 선물할 수 있다. 이렇게 하려면, 퇴행과 기능 손상에 순응하면서 능력에 맞는 목표를 재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피아니스트 레너드 번스타인은 나이가 들자, 먼저 아주 빠른 곡의 연주를 포기했다. 대신 남은 곡을 더욱 집중적으로 연습했다.
처음부터 과한 목표를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세울 필요가 없다. 힘을 빼자. 지금 지닌 열정으로도 자연스럽게 도달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다. 한 의사가 은퇴하면서 무료 진료소나 불우 청소년을 위한 일을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흥분되는 일,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의사는 다발성 경환자를 돕기 위한 자전거 타기 기금 모금 행사에 합류하게 되었다.
하얀 연탄재, 즉 노년기가 되면 고독을 느끼는 사람이 없지 않다. 우려되는 점은 대인관계가 축소되면서 남아 있는 사람에게 과한 요구를 하는 경우이다. 그렇지 않아도 줄어든 대인관계가 더 줄어들고, 균열이 커지면서 고독과 불만이 증가한다. 악순환이다.
반면 적지 않은 사람이 대인관계를 줄이면서도 편안함을 느낀다. 그들은 신앙과 관련해서는 성직자에게, 건강은 의사에게 일임한다. 같은 맥락에서 (당장 성에 차지 않으나) 공적 활동은 정치인에게 맡긴다. “당신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니 당신이 걱정하세요”, 이것이 자율이 주는 즐거움이다.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빌려 말하자면, “5월의 싱그러운 환희 속에서 눈을 그리워하지 않았듯이 크리스마스에 장미를 갈망하지 않는" 태도이다. 고삐를 느슨하게 풀어 운명에 모든 것을 맡기면서 편하게 사는 지혜이다.
돌이켜 보면, 우리가 완성한 작은 일들이 비록 무의미해 보일지라도 그것을 경험하면서 느낀 즐거움은 진짜였다. 그렇다. 우리는 생의 기쁨이 먼 곳에 있지 않다. 이런 맥락에서 작가 박완서는 노년의 즐거움을 이렇게 말한다.
“나이가 드니 마음 놓고 고무줄 바지를 입을 수 있는 것처럼 나 편한 대로 헐렁하게 살 수 있어서 좋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안 할 수 있어서 좋다. (…)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 살아가면서 볼꼴, 못 볼꼴 충분히 봤다. 한 번 본 거 두 번 보고 싶지 않다. 한 겹, 두 겹 책임을 벗고 가벼워지는 느낌을 음미하면서 살고 싶다. 소설도 써지면 쓰겠지만, 안 써져도 그만이다.”
일흔 살 이상의 노인 96퍼센트가 적어도 한 가지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심지어 약 30퍼센트는 다섯 가지 이상 질병이 나타난다. 얼마 남지 않은 인생, 그야말로 여생이다. 지금부터라도 나머지 생을 빛나게 보내야 한다. 와타나베 쇼이치가 ≪지적으로 나이 드는 법≫에서 언급한 세 가지 당부에 귀 기울이자.
"쓰러지지 말 것, 감기에 걸리지 말 것, 의리에 얽매이지 말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