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의 물리학자 닐스 보어가 그의 조국에는 산이 하나밖에 없다고 전했다. 160미터 정도의 산이지만, 아주 높다는 의미로 ‘하늘 산’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러자, 노르웨이 사람들이 한마디 했다.
“우린 이런 걸 ‘구덩이’라고 부르지.”
같은 높이의 산도 환경에 따라 다른 말로 부른다. 명확하지 않은 언어는 내용을 상실한다. 기원전 5세기, 소크라테스는 새로운 소통 방법인 ‘글쓰기’를 비판했다. 그는 얼굴을 직접 보면서 듣는 가운데 이해하는 것하고 글을 통해 전해지는 내용은 차이가 있다고 믿었다. 또한 글에 의존함으로써 ‘기억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소홀하게 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제자 플라톤의 글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졌다.
사진 설명: 튀르키예 에페소 소재 고대 로마의 '칼수스 도서관'
방에 촛불을 켜지 않은 채 창문으로 비치는 햇빛에 의지하여 두 노인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하얀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 힘줄이 드러나는 오른손으로 상대 노인의 무릎 위에 있는 책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말을 건넨다.
손님처럼 보이는 붉은 옷 노인의 표정은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상대방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는 뒷모습만으로도 지금 경청 중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손가락이 책의 두 지점에 책갈피하고 있다. 상대방 말이 끝나는 대로 그 부분에 대한 자기 논점을 펼치고자 함이다. 그러나 긴장한 듯 발가락을 오그렸다.
두 사람의 태도는 온건하지만, 논쟁은 치열한 듯하다. 렘브란트의 명암법(키아로스쿠로)도 이를 확인해 준다. 빛이 논쟁의 중심이 된 부분으로 모였을 뿐만 아니라 책상과 손님의 여행 가방 위 다른 책을 비춘다. 두 사람 모두 학식이 풍부하며, 책을 통해 논거를 갖춘 토론이 진행된다는 점을 명징하게 드러냈다.
인류는 약 400만 년 전부터 직립보행을 했다. 몸을 곧추 세우면, 목젖이 아래로 내려가면서 다양한 소리를 낼 수 있다. 이후 약 20만 년 전쯤 호모 사피엔스의 후두(喉頭)가 완성됨으로써 현대적 언어를 위한 해부학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최초의 문자는 기원전 3000년경 고대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인이 사용하던 설형문자(쐐기문자)이다. 문자는 통제를 위해 태어났다. 그러나 처음부터 지배계급의 독점물은 아니었다. 고대 이집트에서 대규모 국가적 공사를 수행하면서 문자를 깨친 사람은 행정을 맡은 서기나 비서들이었다.
하지만 지배계급은 글이 곧 정보이고, 권력이라는 사실을 곧바로 눈치챘다. 따라서 그들은 피지배계층의 문자 해독이 통찰력을 가져오리라 경계했다. 가난한 자들이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인식하면, 복종이라는 위대한 법칙이 도전받는다는 생각이었다. 따라서 일반대중이 문맹에서 벗어나는데 애쓰지 않으면서 오히려 통제하려 들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교육> 항목에서 그들의 냉소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다.
“평생을 가난하게 살아갈 아이에게는 정직과 인내를 첫 번째 덕목으로 가르쳐야 한다. 부와 명예가 더 큰 행복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자기 분수에 만족해야 한다는 것을 알도록 하라.”
책은 태생적으로 사치품이었다. 성경 한 권을 양피지에 옮기려면, 약 200마리의 양이 희생되었다. 비용을 줄여야 했던 중세 유럽에서는 교회 내에서 수행 도구로 활용하는 필사본이 환영받았다. 교회에서 문자 통제가 가능해졌다는 뜻이다.
당시 교회의 '금서'로 희생된 대표적인 사상이 바로 고대 그리스의 쾌락주의다. 쾌락주의는 유물론적 세계관인 데모크리티스의 원자론에 근거함으로써 기독교와 대척점에 섰다. 그러나 루크레티우스는 "자연의 기본적인 구성요소와 보편적인 법칙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삶에서 추구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쾌락의 하나"라고 말했다. 사후가 아닌 현실 세계에 집중하라는 가르침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포조 브라촐리니의 필사본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가 발견되면서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몽테뉴, 마키아벨리 등이 쾌락주의의 참뜻을 이해했다. 이후 다윈, 프로이트, 아인슈타인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와 관련, 하고 싶은 이야기가 덴마크의 하늘산이 아니라 노르웨이의 고산준봉만큼이나 많다. 그러나 오늘은 국내에서 발간된 ≪1417년, 근대의 탄생≫과 ≪피렌체 서점 이야기≫의 소개로 대신한다.
단테가 피렌체어로 서사시 ≪신곡(1308~1321≫을 썼다. 훗날 피렌체어는 이탈리아 국어로 격상하는 대중적 언어가 되었다. 그리고 독일에서는 비텐베르크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소속 수사 마르틴 루터가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문자가 대중의 곁으로 쉽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1468년, 드디어 유럽에 구텐베르크의 활판 인쇄술이 등장했다. 활판 인쇄는 급속한 정보 전달 능력이 생명이다. 한편, 당시 인쇄술의 확산에는 유쾌한 착각이 있었다. 교회가 성경이 값싸게 많이 보급되면, 자연스럽게 신실한 신자가 늘어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인쇄술은 잠자던 인류의 보편적 이성을 깨우는데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1517년, 루터가 면죄부에 반대하는 ‘95개 논제’를 발표했다. 예전 같으면, 그저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그칠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번역한 성서를 읽고 그간 교회의 일방적 해석에 불만을 지닌 사람들이 예상보다 많았다. 차제 인쇄술은 루터도 놀랄 정도로 빨리, 그리고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3년 후 루터는 자신을 파문한 교황의 칙서를 불태워버릴 정도로 배짱을 부릴 수 있었다.
‘일반 독자’라는 개념이 생긴 것은 약 300년 전에 불과하다. 문자가 빈부, 계급의 벽을 넘어서게 도와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도 19세기 영국 전체 남자의 40퍼센트가 문맹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가난했고, 시간적 여유가 없었으며, 사회의 편견과 불공정한 기회로 인해 독서를 향유하지 못했다.
하지만 낭독회가 생겼고, 공공도서관이 세워졌다. ≪펭귄 페이퍼백≫과 같은 싼값의 일류 도서가 발간되었다. 신문이 나오고, 대학이 설립되었다. ‘죽을 때 부유한 것은 수치’라는 신조를 지니고 있던 미국의 카네기는 무려 2,811개의 무료 도서관을 건립했다. 마침내 하녀가 시를 쓰고, 가난한 서민의 자식이 영국 총리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
뭘 해도 좋은 계절, 가을이다. 먼저 책을 펴자. 지식을 키우고, 그것을 다듬어서 지혜로 채우자. 그럼, 권력이 뒤따라온다. 권력도 중독성 있는 쾌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