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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슬기롭게 받아들이는 자세

by 노인영

기적이란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 혹은 ‘신에 의하여 행해졌다고 믿어지는 불가사의한 현상’을 말한다. 노벨상 수상자이자 현대 물리학계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는 리처드 파인만은 꽃에서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우주의 경이로움까지 볼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자연법칙만 믿을 뿐 기적을 믿지 않았다.

밤 9시 22분, 아내 아를린이 결핵으로 죽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방에 있던 탁상시계가 동시에 멈췄다. 기적으로 받아들일 만하다. 그러나 파인만은 이것을 신의 조화로 수용하지 않았다. 그 탁상시계는 낡았고, 조그만 충격에도 곧잘 멈추곤 했다. 간호사가 사망 시간을 확인하려고 시계를 들었다가 내려놓았을 때 가벼운 충격이 있었고,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아르놀트 뵈클린의 <페스트(흑사병, 1898)>

스위스의 상징주의 화가 뵈클린이 죽기 3년 전에 <페스트>를 그렸다. 질병이 휩쓴 도시는 잿빛 폐허로 변했다. 피부색까지 검은 페스트가 짐승 등에 올라탄 채 하늘을 날고 있다. 그 아래 죽은 신부의 흰옷과 그 위에 쓰러진 여인의 붉은색 옷이 강렬한 대비를 이룬다. 놈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사납게 낫질을 해댄다. 사람들이 죽어 나뒹굴고 일부는 영문도 모른 채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려 한다. 하지만 힘에 부쳐 어쩌지 못한다.

그런데 놈이 탄 날개가 박쥐의 것이다. 그리고 꼬리 끝이 입 벌리고 있지만, 이 역시 쥐의 것을 닮았다. 페스트는 1차 숙주 쥐에 기생하는 벼룩에 의해 세균이 옮겨져 발생하는 급성 열성 감염병이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이 그림은 페스트를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뵈클린에게 모두 열네 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그중 여덟 명이 어릴 때 사망했다. 페스트, 콜레라, 티푸스 등 전염병으로 인한 불행이었다. 이런 개인사가 그로 하여금 평생 ‘죽음’이란 주제에 천착하게 했을지 모른다.


유럽은 13세기 잦은 홍수로 흉작인 상황에서 1346~1351년간 페스트가 발생했다. 초기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감염자의 평균 치사율이 60~70퍼센트였고, 당시 유럽 인구의 3분지 1인 약 2,000만 명이 죽었다.

이때 죽음에 대한 공포는 정치, 경제적 대변혁을 초래했다. 토마스 아퀴나스 시대의 특징이었던 합리주의적 신학이 믿음을 잃고 처참히 무너졌다. 여기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비겁한 행동도 한몫했으며, 이것이 훗날 루터의 종교 개혁이 성공하는 원인 중 하나로 작동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개인적인 형태로 신과 교류하려는 신비주의가 유행했다. 채찍질하는 고행파가 있었으며, 성 세바스티아누스를 페스트의 수호성인으로 모셨다. 그는 3세기 로마 시대의 군인으로, 아홉 발의 화살을 맞고도 살아났다.

페스트에 걸리면 심한 괴사로 발목 부위에 반점이 생겼는데, 그 모양이 화살처럼 생겼다. 페스트가 신이 분노하여 쏜 화살 때문이라는 믿음이 싹텄으며,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그림은 부적처럼 급격하게 유포되었다. 바이러스의 실체를 짐작조차 못 했던 사람들이 기적을 간구하는 마음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기적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다짜고짜 진위를 다툰다. 그리곤 오늘날의 잣대로 미신, 혹은 무의미한 행위로 예단한다. 그러나 핵심은 합리성이 아니라 기적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다. 점성술, 연금술도 당대에는 미신이 아니라 훌륭한 과학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 미국인이 인도네시아 산골에 들어가 2년을 살았다. 그는 그곳 원주민들이 아침을 먹고 나면, 조상에게 준다며 남은 음식을 집 기둥 아래 놓는 것을 지켜보았다. 미신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원주민의 행위 이면에는 열대우림 속에 목재로 짓는 이곳 가옥의 특성이 반영되었다. 집의 몸체를 땅바닥으로부터 조금 띄워 지었는데 음식을 두지 않으면, 개미들이 나무 기둥을 갉아먹어 집 전체가 위태로울 수 있었다.


한스 에른가르트는 수정을 활용해 금속을 탐지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검증에 들어갔다. 열 개의 똑같은 플라스크 중 하나를 무작위로 골라 금속 조각을 넣고, 알아맞히도록 했다. 20번 중 최소 7번을 맞혀야 에른가르트가 이기는 것으로 정했다. 확률은 0.3퍼센트 이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놀랍게도 8번이나 어떤 플라스크에 금속이 있는지를 정확히 맞췄다. 몇 달 뒤 상금을 걸고 과학자들을 배심원으로 다시 검증했다. 이번에도 60회 중 21회를 맞혔다. 세상이 옥신각신했다.


이때 다른 한편에서 이 현상에서 뭔가 배우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연구 결과, 초자연적 현상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특정 금속의 합금이 꽤 많은 양으로 존재하고 복잡한 기하학 구조를 가진 특정한 수정을 사용할 경우, 동일한 현상이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이후 관련 연구는 ‘에른가르트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학술 논문 수도 급속히 증가했다. 뇌 과학 발전으로 이어졌고, 고온 초전도 현상의 수수께끼를 풀어냈다. 연달아 세 번의 노벨 물리학상과 두 번의 노벨 화학상이 뒤따랐다.


중요한 것은 상상이나 눈속임에 근거하지 않고 진정한 효과가 존재한다면, 과학적 연구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기적이 전해주는 메시지를 정확히 읽어낸 결과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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