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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언, 하지 마라! 그래도 하겠다면, '잘'해라

by 노인영

조그만 항구에서 한 가난한 어부가 자기 보트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다. 이곳으로 휴가를 온 사업가가 사진을 찍다가 마침 어부를 만났다. 그리고 잠에서 깬 어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사업가는 어부가 한 차례만 출어하고, 나머지 시간은 지금처럼 논다는 말을 들었다. 빈둥거린다고 생각한 사업가는 참기 어려운 충동으로 조언했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출어를 좀 더 자주 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어부가 “왜요?”라고 되물었다. 사업가는 열심히 설명했다. 세상사와 자본의 논리 등 뭐 이런 이야기였을 것이다. 어부는 돈을 그렇게 모아 뭘 하는지를 궁금해했다. 사업가는 힘주어 다시 설명했다. “그런 다음, 이 항구에서 편안하게 즐기는 거요. 멋진 바다를 배경으로 삼아 달콤한 낮잠도 자고.” 그러자 어부가 한마디 했다.


“내가 지금 바로 그러고 있잖아요.”


소설가 하인리히 뵐이 쓴 ≪노동윤리의 몰락에 관한 일화(1963)≫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런데 사업가는 왜 낯선 이에게 쓸데없는 오지랖을 떨었을까? 문득 “세상의 모든 불행은 홀로 조용하게 자신의 방에 앉아 있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앤드루 와이어스, <크리스티나의 세계(1948)>

앤드루 와이어스는 추상미술이 주류를 이루는 미국 화단에서 사실주의적 구상화를 그렸다. 그의 대표작 <크리스티나의 세계>이다. 그림 속 여인은 이웃 안나 크리스티나 올슨이다. 퇴행성 근육 질환을 앓고 있는 그녀는 깡마른 팔다리와 가냘픈 체구를 지닌 채 다리를 절었다.

따라서 들판 위 농가를 응시하는 그녀의 뒷모습은 연약하고 고립되었다. 반면 목표를 향해 기어코 돌진하는 어떤 초월적 의지를 발견할 수 있다. 와이어스 역시 “절망적이라고 여길 삶을 이겨낸 그녀의 놀라운 성취를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과제였다"라고 말했다. (대문 사진: 앤드루 와이어스의 실제 '올슨 하우스')


화가는 최초에 여성을 넣지 않고, 들판과 집만 그리려 했다. 그런데 아내 뱃시의 강력한 권유를 받아들이면서 작품은 단순한 풍경화에서 심리적인 풍경화로 격상했다. 흔히 와이어스가 명배우라면, 통찰력을 갖춘 뱃시는 명감독이라는 말을 듣는다.

하지만 와이어스는 무려 14년간 아내 모르게 헬가 테스토프를 모델로 누드 및 초상화 240여 점을 그렸다. <헬가> 연작이다. 와이어스는 자칫 아내에게 지배당해 그녀 없이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행동으로 옮겼으며, 평생 비밀로 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림을 먼저 본 아들이 “최고의 작품이니 엄마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라며 아버지를 설득했다. 실제 작품을 본 뱃시는 “그림이 별로였으면, 당신을 죽였을 거야”라는 반응을 보이고 넘어갔다. 아내는 배신감을 느꼈으나 남편과 헬가의 관계 역시 의심하지 않았다. 이미 저질러진 일, 어머니의 담대한 성격을 잘 알고 있던 아들의 현명한 조언이 이끌어낸 결과였다.


조언, 그 행위 자체를 나무랄 수는 없다. 또한 많은 사람이 타인의 조언으로 인해 인생의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한다. 하지만 조언이 영향력을 발휘하려면, 먼저 상대방이 경청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허공을 맴도는 메아리가 되기 십상이다.

특히 기성세대는 다음 세대를 향해 곧잘 교훈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나름 애정을 갖고 전하는 조언이리라. 하지만 청년들은 부모 세대의 생각이 지금의 현실과 동떨어졌다고 여긴다. 그래서 직접 부딪쳐 본 후 스스로 터득하려고 한다. 청년의 특권이자, 기성세대가 엊그제 밟아왔던 바로 그 길이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서른한 살에 노벨상을 받은 천재 물리학자다. 맨해튼 프로젝트를 주관한 오펜하이머의 옛 동료였던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원자탄 개발에 참여했다. 그러나 전후 진술에 있어서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 주변에 실망을 안겼다. 일흔네 살을 일기로 죽어가던 그는 회한에 북받쳤던 "물리학보다 인간이 중요했다"라고 고백했다. 이때 그는 친구 발터의 어머니가 예전에 들려주었던 조언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하이젠베르크는 학창 시절에 훗날 유명한 첼리스트로 성장하는 발터의 별장에서 피아노를 치며 합주를 즐겼다. 그의 뛰어난 재능을 눈여겨보던 발터 어머니는 진로를 고민하는 하이젠베르크에게 자연과학을 전공한 이유를 물으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이 세상은 젊은이들이 무엇을 원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단다. 젊은이들이 아름다운 것을 선택하면 아름다운 것이 더 많아질 테고, 실용적인 것을 선택하면 실용적인 것들이 더 많아질 테지. 그래서 각 개인의 결정은 자신뿐 아니라 인간 사회에도 중요한 거란다."


그러나 개인적인 경험에 비춰보면, 조언은 했을 때보다 꾹 참고 안 했을 때 결과가 더 좋았다. 때와 장소 그리고 상대방의 처지를 잘 살펴야 한다. 어쩌면 그(혹은 그녀)는 조언을 구하는 게 아니라 그냥 자기편에 서주기를 바랐을 수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조언하는 사람의 통찰력에 따라 울림의 크기가 결정된다는 점이다.


“아빠, 자살해도 괜찮은 거야?”


쓰루미 슌스케에게 초등학교 6학년 아들이 물었다. 오카 마사후미(岡眞史)가 아버지 고사명(高史明)이 쓴 ≪산다는 것의 의미≫를 읽고 자살한 것에 충격을 받고 던진 질문이었다.


“응, 자살해도 돼. 단 두 가지 경우에만! 전쟁에 끌려가서 적군을 죽이라고 명령받았는데 죽이고 싶지 않으면, 또 너는 남자니까 여자를 강간하고 싶어지면, 그전에 목을 매고 죽는 게 나아.”


그의 대답은 빠르고, 짧고, 명료했다. 통상 생각 회로는 ‘어려운 문제가 주어진다→생각한다→답이 생각나지 않는다→어떻게든 (모두 생각할 만한) 대답을 찾아낸다’가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때의 쓰루미 슌스케는 ‘어려운 문제가 주어진다→대답한다”가 끝’이다. 이미 자기 생각을 지니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묵직한 답변이었다. 기성세대가 이 땅에서 훌륭한 시민으로 남을 수 있는 자격을 보여준 영웅담이라 할 수 있겠다.


말은 쉽다. 아아! 그러나 오늘 나는 길을 잃고 헤맬 수밖에 없는 조언을 거리낌 없이 던졌다. 더 숙고하고, 더 명상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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