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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훔쳐보는 이야기, 점 혹은 신탁

by 노인영

1980년대 대한민국에서는 화투, 정확히 말하면 ‘고스톱’ 열풍이 불었다. 점심시간, 음식점 방에서 식사가 나오기 전 막간을 이용하여 판을 벌렸다. 심지어 공항 바닥에 앉아서 고스톱 치는 모습이 TV 뉴스에 나올 정도였다.

80년대 중, 후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지인의 모친 상가에서 유명 작명가와 어울려 고스톱을 치게 되었다. 그는 사주를 풀어 다가오는 액을 물리치고 복을 불러들이는 이름을 지어주는 것으로 세간에 명성이 자자했다. 미래를 내다볼 줄 안다는 뜻이다. 반면 나는 고스톱을 치면, 주로 잃는 편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내가 그의 돈을 땄다. 기분이 두 배는 더 좋았다. 한 번, 그것도 잠깐의 기쁨이었다. 하지만 이후 나는 점 혹은 역술이 화제에 오르면, 이때의 결과를 안주 삼아 이런 건방을 떨곤 했다.


“좋은 점괘는 덕담처럼 가볍게, 안 좋은 것은 언행을 조심하라는 경구로 받아들이면 된다.”


(대문 사진: 튀르키예 트로이 유적지 발굴 현장. 1871년 독일의 아마추어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의 발굴로 인해 하늘의 신화가 지상의 역사로 바뀌었다. '아가멤논의 황금 가면'이란 이름도 그가 지었다)




폼페오 바토니, <뤼코메데스 궁전의 아킬레우스(1745)>. 봉물장사(오디세우스)의 칼을 들어 구경하는 인물이 아킬레우스다.

신화는 유럽 최초의 문학 작품인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로 꽃을 피웠다. ≪일리아스≫는 신들의 개입과 영웅 중심의 트로이 전쟁을, ≪오디세이아≫는 전후 10년간 오디세우스의 귀향 여정을 다루었다.

두 작품 모두 영웅들의 허무맹랑한 무용담이 아니다. 신과 운명, 대의(大義), 부모와 자식 간의 도리 등과 관련하여 다음 세대의 공감을 끌어내기 위한 스토리텔링이다. 그런데 인간의 질문에 응하는 신의 답변이 신탁의 형태로 전달되었다.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이 트로이 출정 전 신탁을 받고 맏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쳤다. ‘전쟁의 여신’ 아르테미스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서였다. 테티스는 아들이 “트로이 전쟁에 참가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라는 신탁에 아킬레우스를 여자처럼 꾸며 숨겼다.


오이디푸스 신화 역시 출발점은 신탁이었다. 테바이의 왕 라이오스에게 “만약 아들을 낳으면, 장차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신탁이 내려졌다. 친부가 누구인지 모르고 자란 그의 아들 오이디푸스 역시 “장차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신탁을 피하고자 코린토스를 떠났다. 그러나 신탁 그대로 결말을 맺었다.

인간의 뇌는 자신의 의지를 벗어난 이런 상황을 반사적으로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예측 불허의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신탁이 계속 필요했고, 이를 기반으로 국가와 인간의 중대사를 결정했다. 하지만 현실 속 인간에게 던져지는 신탁은 신화와 달리 그 메시지가 모호했다. 따라서 내용보다 해석이 더 중요했다.


델포이 지반에는 화산 지대에 흔히 볼 수 있는 땅속 증기를 뿜어내는 구멍이 있었다고 한다. 그 증기를 들이마신 사람은 정신이 혼미해져서 술 취한 사람이나 열에 들뜬 사람처럼 두서없는 말을 지껄였다. 그곳 증기 구멍 위에 삼발의자를 갖다 놓고 '피티아'라 불리는 여사제 한 명을 앉혔다.

그런 다음, 피티아가 몽롱한 상태로 웅얼거리면 다른 남자 사제가 그 말을 해석했다. 결과적으로 그녀가 중의성(重意性)을 갖는 어휘와 은유를 사용했기에 신탁은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었다.

자크-루이 다비드, <소크라테스의 죽음(1787)>

친구 카이레폰이 델포이를 찾아가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 있는 자가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헬라스(고대 그리스) 땅에서 소크라테스 이상으로 현명한 사람은 없다”라는 신탁이 나왔다. 하지만 정작 이 말을 전해 들은 소크라테스는 신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남보다 절대 지혜롭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젊었을 때 소크라테스는 신전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경구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후 그는 지혜를 구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이제, 깊은 숙고에 들어갔다. 역설적으로 이런 숙고가 소크라테스를 현인으로 만들었고, 2400년간 인류의 스승이 될 수 있었다.


그리스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있다. 고대 그리스 델로스섬에 전염병이 돌았다. 이를 아폴론 신의 노여움으로 생각한 주민들은 대표자를 보내 델포이의 신탁을 구했다. 이때 신의 대답 역시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폴론 신전의 제단을 두 배로 만들어라.”


신전은 정육면체 모양의 제단이었다. 한 변의 크기만 두 배로 한다고 해서 신전이 두 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부피는 8배로 커진다) 따라서 신의 응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델로스 주민들은 이 문제를 들고 아테네의 플라톤을 찾아갔다.

플라톤은 곧바로 ‘정육면체의 부피를 두 배로 만드는 문제’라고 알려 주었다. 당시로선 정답을 구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는 “이 수학 문제를 섬 주민들에게 풀도록 하면, 문제에 몰입한 주민들의 마음에서 전염병에 대한 공포가 가라앉게 될 것”이라는 신의 뜻도 해석해 주었다.


천문학도 신탁처럼 미래를 예측하기 위한 도구로 출발했다. 처음에는 주술의 성격이 강해 점성술로 불렸다. 황도 12궁은 기원전 6세기경 고대 바빌로니아에 등장했다. ‘황도’란 천구 위를 지나는 태양의 가상 궤도, 오늘날 지구의 공전 궤도를 말한다.

이 궤도를 정확히 30도씩 12 등분한 것이 황도 12궁이다. 황소, 염소, 쌍둥이, 게, 사자, 처녀, 천칭, 전갈, 궁수, 양, 물별, 물고기자리. 이 별들은 매일 황도를 따라 조금씩 동쪽으로 움직이는데, 여기에서 어떤 의미를 찾는 것이 점성술이다.

그런데 문제는 점성술의 별자리 위치가 2,500년 동안 그대로라는 점이다. 별자리는 이미 수천 년에 걸쳐 위치가 바뀌어 왔다. 예를 들어, 옛날 염소자리였던 곳은 오늘날 물고기자리다. 이것이 과학으로서 천문학과 점성술이 다른 점이다. 결과적으로 역술에 대한 젊은 시절 나의 경구는 웃자고 한 이야기였으나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럴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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