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어차피 살아야 100년인 것을 (68) 과거 재생산

당신에게서 멈출 수 있다

by seungbum lee

과거 재생산
Q: 왜 어린 시절 받은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줄까요?
A: 무의식적으로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해법은 "내가 받은 아픔을 끊어내는 사람이 되겠다"라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당신에게서 멈출 수 있습니다.


서울의 겨울 아침은 유난히 차가웠다. 회사 건물 앞에서 김도현은 손을 비비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도 긴 하루가 될 게 분명했다.



그는 팀장 승진을 앞둔 7년 차 직장인이었다. 실적은 좋았고 동료 평판도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딱 하나, 신입사원 한서우였다.
요즘 들어 서우를 보면 도현은 괜히 신경이 곤두섰다. 보고서를 가져오면 작은 실수라도 찾아 꾸짖었고,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속으로 짜증이 솟구쳤다.




“왜 저렇게 미숙해? 내가 저 나이 때는…”
어느새 도현은 속으로 단정하고 있었다.
저 친구가 문제야. 내가 괜히 스트레스받는 게 아니야.
하지만 이상한 건, 서우가 보일 때마다 가슴 깊이 묵직한 감정이 되살아난다는 것이었다. 20년 전 기억 속에서 꺼내고 싶지 않던 장면이 자꾸만 튀어나왔다.



대학 시절 첫 인턴을 하던 때였다. 도현에게는 잊을 수 없는 상사가 있었다. 누구보다 똑똑하고 성과가 높았지만, 그만큼 예민하고 냉정한 사람이었다.
“이 정도도 못 해? 다시 해와.”
서류를 들이밀며 말하던 그 상사의 차가운 목소리는 몇 달 내내 도현을 따라다녔다.



칭찬은 단 한 번도 없었고, 첫 실수는 크게 욕을 먹었다.
도현은 자기 자리에서 몰래 이를 악물며 사람들 몰래 눈물을 훔친 적도 있었다.
그 기억은 시간이 지나며 옅어지는 듯했지만, 사실 깊은 곳에 꿰매지 않은 상처처럼 남아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때의 상사가 했던 말투와 표정이…
무의식적으로 자기 입에서 똑같이 튀어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도현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어느 날 팀 회의에서 일이 터졌다.
서우가 보고서에 중요한 수치를 잘못 기재해 전체 일정이 꼬여버린 것이다.
순간 도현은 숨이 턱 막혔다.
“도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이게 회사냐 학교냐?”
회의실 공기가 얼어붙었다. 서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만 숙였다.




회의가 끝난 뒤, 서우는 책상에 앉아 아무 말도 없이 서류만 만지작거렸다. 마치 과거의 ‘도현’처럼.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 도현의 속에서 무언가가 무너져 내렸다.
나는 왜… 내가 받은 상처를 똑같이 반복하고 있는 거지?


그날 밤, 도현은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회사 건물 불빛이 멀어지는데도 마음은 더 어두워졌다.
문득 어린 시절과 인턴 시절, 그리고 오늘 서우를 바라보며 느낀 감정이 하나로 이어졌다.
그는 정말 ‘가르치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를 무의식적으로 재현하고 있었던 것일까?
휴대폰을 열자 어머니에게서 온 3일 전 메시지가 보였다.
“도현아, 요즘 많이 힘들지? 너는 착한 아이야. 상처 준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문장을 보는 순간, 도현은 숨이 턱 막혔다.
마치 누군가 가슴 깊은 데서 묻어둔 상처를 꺼내 손으로 쓰다듬어주는 느낌이었다.
‘내가 받은 아픔을 끊어내는 사람’
그 말을 평소에 스스로에게 한 번이라도 해본 적 있었을까?
도현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이제는 내가 멈춰야 해.”




다음 날, 도현은 서우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잠깐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서우는 긴장한 표정으로 따라왔다. 또 혼나는 줄 알고 몸을 잔뜩 굳힌 모습이었다.
회의실 문을 닫고 도현은 한참을 말하지 못했다.
그러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어제 내가 한 말, 미안했어요.”
서우는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제가 예민했어요.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건데, 제가 너무 과했어요.”
도현은 서우에게 똑바로 말했다.
“우리 팀이 기대하는 건 완벽함이 아니라 성장입니다. 앞으로 모르는 건 편하게 물어봐요. 같이 해봅시다.”
서우의 어깨가 조금 풀리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도현은 알았다.
자신은 지금 ‘누군가의 상처를 이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처음으로 상처를 끊어내는 사람이 되고 있다는 것을.
그날 이후 팀 분위기는 조금씩 달라졌다.




도현도, 서우도, 팀의 다른 누구도 완벽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로에게 상처를 재생산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도현은 종종 생각했다.
어쩌면 누구나 과거의 그림자를 품고 살아간다고.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되풀이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순간,
그 사람의 인생도, 주변 사람들의 인생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서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팀장님… 저 요즘 일이 재밌어졌어요.”
그 말은 도현에게 상사에게 받은 어떤 칭찬보다 따뜻하게 가슴을 울렸다.
그는 미소 지었다.
“그래요. 우리 잘 가봅시다.
… 당신에게서 멈출 수 있어요.”


keyword
월, 화, 목,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