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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서재 (48) 증보판

달빛 서재의 고백

by seungbum lee

달빛 서재의 고백

오래된 문장, 낯선 두려움
‘그 누구도 내 마음을 묻지 않았던 시절, 나는 스스로를 지우는 법을 먼저 배웠다.’




소연은 노트북 화면에 적힌 문장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밤의 장막이 내린 ‘달빛 서재’에는 낡은 책들의 냄새와 그녀의 키보드 소리만이 옅게 감돌았다. 앤티크 스탠드에서 흘러나오는 주황빛 불빛이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문장은 단순했지만, 그 속에 담긴 감정은 깊은 심연에서 끌어올린 듯 솔직하고 날것 그대로였다. 가장 외롭고 힘들었던 시절의 자신이 그대로 박제된 듯한 문장이었다. 소연은 습관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이 글을 쓰는 내내 반복되는 질문은 단 하나였다. ‘이 문장은… 너무 솔직한가?’
그녀는 책방 한편에 자리한 작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방금 마시다 만 따뜻한 캐모마일 차 한 잔과 몇 권의 참고 서적들이 놓여 있었다. 키보드 위에 놓인 손가락은 움직임을 멈춘 지 오래였다. 손끝에서부터 전해지는 감각은 차가운 금속의 촉감이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뜨거운 불길처럼 타올랐다. 회색빛 과거의 잔상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람들 속에서 존재감을 지우려 애썼던 시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고독 속에서 스스로를 갉아먹었던 나날들. 그 시절의 자신을 글로 옮기는 일은 마치 메스를 들고 자신의 심장을 해부하는 것처럼 고통스럽고, 동시에 해방감을 주었다.
소연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몇 년간, 그녀는 글을 쓰는 일에 몰두해 왔다. ‘달빛 서재’라는 이름의 작은 책방을 열고, 그 공간 속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기록하는 일. 처음에는 그저 일기처럼 개인적인 기록에 불과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기록들은 다른 이들에게도 위로와 공감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자신의 가장 깊은 속내를 세상에 드러낼 용기를 내고 있었다. 책의 형태로,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로.




조용한 지지, 흔들리는 마음
“소연아, 그 문장은… 누군가에게 큰 위로가 될 거야. 너처럼 조용히 살아온 사람에게.”
준혁은 언제부터 옆에 와 앉아 있었는지 모르게, 소연의 옆에 조용히 다가와 앉았다.



따뜻한 그의 목소리가 소연의 흔들리는 마음을 단단히 붙잡아 주었다. 소연은 고개를 돌려 준혁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언제나처럼 변함없는 신뢰와 애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준혁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노트북 화면을 함께 응시했다.



그는 소연의 글을 가장 먼저 읽는 독자이자, 가장 든든한 지지자였다.
소연은 준혁의 말에 잠시 눈을 감았다. 글을 쓰는 일은 생각보다 더 깊은 감정을 꺼내는 일이었다. 때로는 잊고 싶었던 과거의 상처가 다시 터져 나와 아물지 않은 채로 피를 흘리기도 했고, 때로는 예상치 못했던 따뜻한 기억들이 떠올라 벅찬 감동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녀는 과거의 자신을 다시 마주하며, 지금의 자신이 얼마나 멀리 왔는지를 실감했다. 웅크리고 숨어 지내던 과거의 자신과, 이제는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으려는 현재의 자신 사이에는 거대한 강물이 흐르는 듯했다. 그 강물을 건너는 것이 두려웠지만, 동시에 강 건너편의 빛이 그녀를 유혹했다.




“준혁아.”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가끔은… 이 글을 세상에 내놓는 게 무서워. 내 마음이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 같아서.”
소연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마치 차가운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위태로웠다. 오랜 시간 동안 스스로를 숨기고 살아왔던 그녀에게, 자신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드러내는 일은 거대한 산을 넘는 것과 같았다. 혹시라도 사람들이 이 글을 비난하거나, 그녀의 솔직함을 조롱할까 봐 두려웠다. 상처받은 마음이 다시금 생채기가 날까 봐 겁이 났다.




준혁은 그런 소연의 불안감을 깊이 이해하는 듯,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의 손은 따뜻했고, 그 온기는 소연의 불안한 마음에 잔잔한 위로를 전해주었다.
“그 마음을 꺼내는 게 누군가에게는 숨 쉴 틈이 될 수 있어. 그리고 나는… 그 글을 가장 먼저 읽을 수 있어서 행복해.”




준혁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단단했다. 그의 말에는 소연의 아픔을 공감하고, 그 아픔조차도 소중하게 여기는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 그는 소연의 글이 가진 힘을 믿었고, 그녀의 용기를 격려했다. 그의 눈빛은 ‘네가 어떤 모습을 보여도 나는 항상 네 곁에 있을 거야’라고 말하는 듯했다. 소연은 준혁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의 존재 자체가 그녀에게는 거대한 버팀목이었다.


과거와의 화해, 미래를 향한 발걸음
그날 밤, 달빛 서재에는 키보드 소리와 함께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준혁은 소연의 어깨에 기대어 함께 화면을 바라봤다. 소연은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망설임과 두려움 대신, 알 수 없는 편안함과 확신이 그녀를 감쌌다. 준혁의 따뜻한 시선과 굳건한 믿음이 그녀에게 새로운 용기를 불어넣어 준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작은 실수에도 스스로를 책망하며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숨어 지내던 아이.



친구들의 웃음소리 속에서도 왠지 모를 소외감을 느끼며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지내던 소녀.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타인의 평가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자신을 억누르던 젊은 여성. ‘달빛 서재’는 그녀에게 그런 과거로부터의 도피처이자, 동시에 자신을 돌아보고 치유하는 공간이었다. 낡은 책들은 그녀에게 지혜를 주었고, 고요한 공간은 그녀에게 사색의 시간을 허락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비로소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문장은 점차 과거의 상처를 넘어 현재의 희망으로 흘러갔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스스로를 지우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존재를, 자신의 이야기를 드러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그녀의 이야기는 비단 그녀만의 것이 아니었다. 이 세상 어딘가에, 소연처럼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스스로를 지우는 법을 먼저 배운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녀의 글은 작은 등불이 되어줄 것이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위로, 그리고 다시 살아갈 용기를 주는 메시지가 될 터였다.
밖은 초가을의 바람이 창을 흔들고 있었고, 그 바람은 소연의 마음속 오랜 짐들을 덜어내주는 듯했다. 잎사귀들이 바람에 부딪히며 내는 사그락거리는 소리는 마치 과거의 속삭임처럼 들렸지만, 더 이상 그녀를 괴롭히지 않았다. 오히려 그 소리 속에서 그녀는 새로운 시작의 징조를 들었다.
소연은 자신이 쓴 문장들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 내려갔다. ‘그 누구도 내 마음을 묻지 않았던 시절, 나는 스스로를 지우는 법을 먼저 배웠다.’ 이제 이 문장은 더 이상 그녀를 아프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고 여기까지 왔는지를 보여주는 훈장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그녀의 강인함을 증명하는 문장이었다. 아픔을 인정하고, 그 아픔을 통해 성장한 자신의 모습을 담담하게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준혁은 소연의 어깨에 더욱 깊이 기댔다. 그는 그녀의 글을 통해 소연의 모든 과거를 함께 나누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기쁨과 슬픔, 고통과 희망이 고스란히 그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들의 사랑은 단순한 연애를 넘어, 서로의 가장 깊은 내면까지도 공유하는 영혼의 동반자 관계였다. 그들은 서로에게 가장 안전한 피난처이자, 동시에 가장 용감한 탐험의 동반자였다.

이야기의 완성, 사랑의 확장
밤이 깊어갈수록 ‘달빛 서재’는 더욱 깊은 평화에 잠겼다. 소연은 노트북을 닫고 준혁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더 이상 두려움이 없었다. 대신 고요하고 깊은 감사의 마음과, 작은 확신이 피어올랐다.




“고마워, 준혁아.” 그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네가 없었다면 이 글을 완성하지 못했을 거야.”
준혁은 소연의 손을 다시 잡았다. “너의 용기 덕분이야, 소연아. 나는 그저 네 옆에서 지켜봤을 뿐이야.”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그들의 눈빛 속에서 수많은 말들이 오고 갔다. 함께 쌓아온 시간, 서로를 향한 믿음, 그리고 앞으로 함께 만들어갈 미래에 대한 기대감.
그날, 두 사람은 다시 꺼내는 마음속에서 서로를 더 깊이 이해했고, 그 이해는 글이 되고, 글은 또 다른 이야기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소연의 이야기는 이제 더 이상 그녀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상의 수많은 외로운 영혼들에게 닿아, 그들에게도 ‘숨 쉴 틈’을 선사할 것이었다. 자신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드러내는 용기가, 오히려 가장 강력한 위로가 될 수 있음을 그녀는 깨달았다.
소연의 책은 곧 세상에 나올 예정이었다. ‘달빛 서재’라는 제목의 에세이집. 그녀는 책 표지에 작고 은은한 달빛이 비치는 책방의 이미지를 넣었다.




그리고 그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이렇게 적을 예정이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당신은 혼자가 아니며, 당신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빛나는 기적입니다. 부디 이 작은 서재에서 잠시 쉬어가세요.’
초가을의 밤은 깊어갔지만, 달빛 서재 안에는 꺼지지 않는 따뜻한 불빛과, 두 사람의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희망의 빛이 가득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었다. 소연의 글이 세상에 나가 수많은 이들의 마음에 닿고, 그 글을 통해 또 다른 인연들이 생겨나고, 그렇게 세상은 ‘달빛 서재’처럼 따뜻하고 고요한 공감의 공간들로 채워질 것이었다. 소연과 준혁은 그 길을 함께 걸어갈 것이었다. 글이 만들어낸 사랑과 이해를 바탕으로, 더 넓고 풍요로운 이야기를 향해 나아갈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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