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문장이 머무는 자리
바람이 머무는 책방
초가을의 바람이 골목을 스치고 지나가던 오후, 작은 책방 ‘틈’의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문을 연 사람은 오십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성.
그녀는 잠시 문턱에서 멈춰 서서, 마치 오래전 잃어버린 장소를 다시 찾은 사람처럼 책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책방 안은 고요했다.
천장에 걸린 작은 조명들이 따뜻한 빛을 흘리고, 오래된 나무 바닥은 발걸음마다 은은한 소리를 냈다.
한쪽에서는 잔잔한 기타 선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카운터 뒤에서 원고를 정리하던 소연은 고개를 들었다.
여성의 손에 들린 잡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 잡지에는 소연이 쓴 에세이의 일부가 실려 있었다.
여성은 조심스럽게 다가와 잡지를 펼쳐 보이며 말했다.
“소연 님… 이 문장, 저한테 정말 큰 위로가 됐어요.”
그녀가 손가락으로 짚은 문장은 바로 이것이었다.
“조용한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소연은 순간 말을 잃었다.
그 문장은 그녀가 가장 힘들었던 시절, 숨을 고르기 위해 쓴 문장이었다.
누군가에게 닿을 거라 기대하지도 않았던 문장.
“…그 문장은요.”
소연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가 정말 버티기 힘들었던 시절에 쓴 거예요.
그때는… 숨 쉴 틈이 필요했거든요.”
여성은 책방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리고 마치 오래 생각해온 결론을 내리듯 말했다.
“이 공간이… 그 문장 그대로네요.
조용하지만 따뜻하고,
무너지지 않게 붙잡아주는 느낌이에요.”
그 말에 소연은 가만히 숨을 들이켰다.
책방 ‘틈’을 만들며 꿈꿨던 바로 그 말이었다.
글이 닿는 자리
여성이 돌아간 뒤에도 책방은 고요했다.
하지만 소연의 마음속에는 작은 파문이 일고 있었다.
그녀는 책방 구석, 늘 글을 쓰던 작은 테이블에 앉았다.
마지막 장을 남겨둔 원고가 화면에 떠 있었다.
이제 정말 끝을 맺어야 했다.
그때, 문이 다시 열렸다.
준혁이었다.
“오늘은 좀 일찍 왔네?”
소연이 웃으며 말했다.
“네가 오늘 원고 마무리한다고 했잖아.
옆에서 조용히 응원이라도 해주려고.”
준혁은 늘 그랬다.
말이 많지 않지만, 필요한 순간에 곁을 지켜주는 사람.
책방을 함께 꾸려온 동료이자, 소연이 마음 깊이 의지하는 존재.
소연은 화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마지막 문장만 남았어.
근데… 어떤 말로 끝내야 할지 모르겠어.”
준혁은 그녀 옆에 앉아 잠시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그동안 네 글이 누군가의 마음을 안아줬다면…
마지막 문장은 너 자신을 안아주는 말이면 좋겠어.”
그 말은 소연의 마음 깊은 곳에 닿았다.
그동안 그녀는 늘 누군가를 위로하는 글을 쓰려 했다.
하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단 한 번도 따뜻한 말을 건넨 적이 없었다.
소연은 천천히 키보드를 눌렀다.
조용한 위로의 의미
글을 쓰는 동안, 그녀의 머릿속에는 지난 몇 년이 스쳐 지나갔다.
힘들었던 직장 생활,
밤마다 이어지던 불안,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숨 쉴 틈이 필요하다”는 생각 하나로 시작된 이 책방.
책방을 꾸미던 날,
첫 손님이 들어오던 날,
그리고 오늘처럼 누군가가 그녀의 문장을 읽고 위로받았다고 말해주던 순간들.
그 모든 순간이 하나의 흐름처럼 이어졌다.
그녀는 마침내 마지막 문장을 완성했다.
“이제는,
나 자신에게도 조용한 위로를 건넬 수 있다.
그게 이 책방이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이다.”
문장을 쓰고 나자,
마치 오래 묵은 돌을 내려놓은 듯한 가벼움이 찾아왔다.
준혁이 조용히 말했다.
“좋다. 정말… 너다운 마무리야.”
소연은 그 말을 듣고 처음으로 마음 깊이 미소 지었다.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
창밖에서는 초가을의 바람이 창문을 흔들고 있었다.
책방 안에는 기타 선율이 잔잔히 흐르고,
책 냄새와 나무 향이 섞여 따뜻한 공기를 만들고 있었다.
그날, 두 사람은 책방 한가운데 앉아
글이 닿는 자리에 조용히 머물렀다.
말이 많지 않아도 괜찮았다.
서로의 마음이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연은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닿는 글을 쓰는 것도 소중하지만,
이제는 자신을 지켜주는 글을 쓰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글들이,
이 책방에서 또 다른 사람에게
조용한 위로로 건네질 거라는 것을.
그날 이후,
책방 ‘틈’은 더 많은 이야기를 품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상처가 머물다 가고,
누군가의 용기가 다시 피어나는 공간.
그리고 소연과 준혁의 마음도
그 책방과 함께
또 다른 이야기로 조용히 걸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