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관 골목
장막이 내려앉은 진주관
진주관의 문이 닫힌 후, 골목은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낮 동안 웃음소리가 넘쳐나던 요정은, 밤이 되면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냈다. 환락의 전등이 꺼지자, 뒷문 주변에는 오래된 돌담과 축축한 흙냄새만이 남았다. 모퉁이에 달린 작은 등불 하나가 바람에 흔들리며 가느다란 빛을 흘렸다.
변성자는 문고리를 조심스레 밀었다. 삐걱— 오래된 나무 경첩의 울림이 어둠의 표면을 긁었다. 그 순간, 어둠 속의 누군가가 가볍게 움직였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기 전부터, 변성자는 이미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이 시간, 이 장소를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정혁제.
그는 늘 그렇듯 조용히, 그러나 위압적인 존재감으로 서 있었다. 어둠의 일부처럼 움직이는 남자였다.
비밀의 대화
변성자는 조심스럽게 다가섰다.
“정 선생님…”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떨림이 없다.
정혁제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묻는다.
“변 사장, 무슨 일인가?”
숨을 고른 변성자는 오늘 낮에 있었던 모든 것을 차례로 풀어놓았다.
“박성표, 백정치, 조병수가… 세 사람이 2층 방에서 만났습니다. 말투로 미루어 보아, 이산갑 도련님을 감시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정혁제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품속의 작은 수첩을 꺼내 펼쳤다. 오래 습기에 젖은 듯 군데군데 번진 글귀들이 드러났다.
변성자의 말이 이어졌다.
“조병수는 학당 주변에 눈을 붙이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박성표는 일본 당국에 정보를 흘리는 역할인 듯합니다. 도련님께는 곧 위험이 올 수 있습니다.”
정혁제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이 수첩을 천천히 훑었고, 멈춘 곳에는 익숙한 이름이 있었다.
“…박성표.”
그는 중얼거리듯 말했지만, 그 속엔 날선 분노가 있었다.
“그자는 학당 화재 때도 그림자처럼 움직였지. 직접 증거는 없지만… 냄새가 났어.”
변성자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녀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
“조병수는 더 위험합니다. 돈이면 뭐든지 하는 자입니다. 손에 피를 묻히는 것도 거리낌이 없어요. 영광에서 법성포까지 그의 정보망이 촘촘합니다.”
정혁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속에서 이미 급박한 판단들이 빠르게 조립되고 있는 듯했다.
“좋은 정보요. 항상 고맙소.”
그는 품속에서 작은 봉투 하나를 꺼내 변성자에게 건넸다.
“이번 달 사례금이오.”
과거의 그림자
봉투를 두 손으로 받으며, 변성자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에는 슬픔 아닌 결연함이 맺혀 있었다.
“정 선생님… 저는 괜찮습니다.”
그녀는 봉투를 가슴 가까이에 붙였다.
“이 일이… 제 남편의 원수를 갚는 길이니까요.”
바람이 한 번 불었고, 그녀의 옆머리가 푸드득 흔들렸다.
진주관의 사장 변성자는, 한때 조용한 상인의 아내였다.
그러나 남편은 일본 순사에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잡혀간 뒤, 결국 고문 후유증으로 죽었다.
시신을 확인하던 날, 그녀는 스스로 다짐했다.
‘나도 싸우겠다. 내가 가진 모든 것으로.’
그녀의 싸움은 칼도 총도 아니었다.
그러나 정보라는 무기는 언제나 총보다 강했다.
정혁제는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짧은 위로이자, 동지에게만 건넬 수 있는 손길이었다.
“변 사장도 조심하시오. 들키면… 그들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오.”
변성자는 눈을 깊이 내리깔고 말했다.
“괜찮습니다. 저에게 선택지는 이미 없으니까요.”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자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 두 사람이 만들어낸 조용한 비밀의 공간 안에서, 진주관 뒷길의 어둠이 더욱 깊어졌다.
“조선이 독립하는 날까지…”
정혁제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우린 끝까지 함께 싸울 것이오。”
변성자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선명했다.
“네, 선생님.”
정혁제는 더 말없이 몸을 돌렸다.
그의 외투 자락이 바람 속에서 부드럽게 흔들렸고, 곧 그는 어둠과 하나 되듯 사라졌다.
남겨진 변성자는 품에서 수첩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는 조병수의 이름이 새로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수첩을 다시 품 안 깊숙이 넣었다.
언젠가… 반드시 쓰일 이름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뒷문을 닫고, 아무도 모르게 다시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진주관의 밤은 그렇게 또 하나의 음모를 삼키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침묵을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