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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서재 (55)

변화의 소리

by seungbum lee

변화의 소리


흔들리는 벽 앞에서
“오늘부터 공사 들어간대요.”
아침 문을 열자마자 건네진 준혁의 말에, 소연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책방 옆 공간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미묘한 긴장과 설렘이 섞여 있었다.
“옆 공간 벽을 터서 연결하는 작업부터 시작한대.”
소연은 쓰던 책 한 권을 덮으며 창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햇빛이 오래된 목재 바닥에 부드럽게 스며들고,
창문 옆에 걸린 말린 라벤더 묶음이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조금… 이상한 기분이야.”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이 공간이 나를 지켜줬는데,
이제 내가 이 공간을 바꿔야 한다는 게.”




책방 ‘달빛 서재’는 그녀가 가장 낮은 곳에 떨어졌던 시절부터 함께였다.
어떤 날은 이곳에서 울었고,
어떤 날은 겨우 살아내기 위해 글을 옮겨 적었다.
좁고 조용한 이 공간이 그녀에게는 몸을 기대는 ‘숨’이었다.
준혁은 그녀의 손등을 부드럽게 감싸며 말했다.
“그건 지키는 거야.
더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도록,
조금 더 넓게 숨 쉴 수 있도록 만드는 거.”
그의 말은 조용했지만 묘하게 단단했다.
마치 책방 안에 드리운 햇빛처럼,
천천히 그녀의 마음을 덮었다.



변화의 소리가 찾아오다
공사 첫날 아침, 책방 안엔
평소의 적막 대신 낯선 진동이 가득했다.





망치질, 드릴 소리, 벽이 흔들릴 때 나는 낮은 울림.
고요로만 채워져 있던 책방이
처음 보는 리듬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소연은 창가 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손님이 거의 없는 오전 시간,
그녀는 오래된 컵에 커피를 따라 놓고
낯선 소리들을 유심히 들었다.
탕—
그르르르—
드르륵.
책장 사이를 메우던 정적이
새로운 공간의 호흡으로 채워지는 것만 같았다.
“이상하다…”
소연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처음엔 너무 낯설었는데…
이제는 조금 설레.”
준혁은 그녀의 옆에 천천히 앉았다.
그는 작업복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말했다.
“변화는 늘 낯설지.”
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그 안에 우리가 있다면…
그건 결국 우리 다운 공간이 될 거야.”
소연은 그 말을 천천히 삼켰다.




벽이 무너지는 소리가
이상하게도 그녀 가슴 안쪽까지 파고드는 듯했다.
마치 오래 붙잡고 있던 두려움이
같이 무너져내리는 것처럼.
창밖에는 가을빛이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황금빛 잎사귀가
옆 건물의 지붕 위에 조용히 내려앉고,
책방 안으로 들어오는 빛은지난 계절보다 한층 따뜻했다.




두려움의 자리를 비우다
공사가 진행될수록,
책방은 매일 조금씩 달라졌다.
벽 한쪽이 허물어지고,
새로운 보드가 들어오고,
우드 파티션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어색했던 빈틈들은
조금씩 ‘무언가가 될’ 기미를 보였다.
하지만 변화가 늘 설렘만을 남기는 건 아니었다.
어느 날 오후,
벽을 더 크게 확장해야 한다는 공사팀의 말이 들렸다.
큰 장비가 들어오고,
소연이 아끼던 창가 테이블도 잠시 옮겨야 했다.
그 순간 그녀의 마음 어디선가
작은 불안이 고개를 들었다.
‘이 공간이 너무 많이 변하면…
내가 사랑했던 이 책방도 달라져 버리는 건 아닐까?’





그녀는 무심코 준혁을 바라보았다.
그는 공사팀과 도면을 보며 설명을 듣는 중이었다.
표정은 깊지만, 흔들림은 없었다.
작업이 잠시 멈춘 틈,
소연은 그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준혁아…
가끔은 무서워.”
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공사 소리 너머로 들리는 그녀의 작은 목소리에
그의 시선이 단번에 집중되었다.
“뭐가?”
“무너뜨리는 게…
괜히 잘못 건드리는 게…
나중에 후회하게 되는 건 아닐까 해서.”
준혁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손을 살짝 잡고
그녀와 함께 허물어진 벽 쪽으로 걸었다.




“여기 봐.”
그는 새로 생긴 빈 공간을 가리켰다.
“무너진 자리는 이렇게 보이잖아.
텅 빈 것 같고… 뭔가 빠져나간 것 같고.”
소연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곧 알게 될 거야.”
준혁이 이어 말했다.
“좁았던 벽이 넓어지고,
닫혀 있던 길이 통하고,
우리가 숨 쉴 새로운 자리가 생긴다는 걸.”
그리고 그는 조용히 덧붙였다.
“사람도 그래.
두려움을 무너뜨리면
그 자리에 꼭 새 숨이 들어와.”
그 말은
작은 먼지 입자들 사이로
은은하게 빛나는 햇빛처럼
소연의 마음에 내려앉았다.


새로운 공간으로 걸어가는 마음
몇 주 뒤,
공사 소리는 한층 잦아들었다.
거칠던 소리 대신
새 가구를 조립하는 듯한 차분한 톤이 들리기 시작했다.
책방 안으로 들어온 가을의 마지막 햇빛은
이전보다 부드럽고 넓게 퍼졌다.
창가 테이블은 조금 옮겨졌지만
여전히 그녀를 위해 빛을 품어주고 있었고,
확장된 공간엔 새로운 서가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준혁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제 거의 다 됐어.
곧 문 여는 날 잡아야지.”
소연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처음 책방을 열던 날처럼
어색하고 설렜던 감정이
다시 가슴 안쪽에서 일어났다.
“준혁아.”
그녀가 조용히 불렀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이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했다.
“네가 내 옆에 있었기 때문이야.
네가 아니었으면…
아마 벽 하나도 못 건드렸을 거야.”
준혁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조용히, 하지만 확신 안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네가 있으니까,
어떤 변화를 맞아도 괜찮다고 느껴.”
그 순간,
공사팀이 문을 닫고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책방 안에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하지만 그 고요는 예전과 달랐다.
더 넓고, 더 깊고,
어딘가 새로웠다.
소연은 준혁과 나란히 앉아
확장된 공간을 바라봤다.
새 서가, 넓어진 바람길,
그리고 아직 채워지지 않은 빈 공간들.
그 빈자리들이
어쩐지 희망처럼 보였다.
“우리…”
소연이 말을 꺼냈다.
“이 공간처럼,
앞으로도 같이 조금씩 넓어졌으면 좋겠다.”
준혁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은 따뜻했고,
그 warmth는 책방 전체에 퍼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밖에서는 가을빛이 천천히 저물고 있었고,
안에서는 새로 태어난 조용한 숨이
책장 사이를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두 사람은 변화의 소리 속에서
서로의 마음을 다시 붙잡았다.
그 마음은
하나의 공간을 넘어
두 사람의 내일을 향해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한 발걸음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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