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말이야..."
냉장고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리 이번 일로 많이 배운 것 같아. 전기가 얼마나 소중하고, 또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맞아."
전압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30년 동안 220볼트로 살아왔어. 그게 내 정체성이고, 내 존재 이유야. 하지만 3일 전... 380볼트가 됐을 때..."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나 자신이 아니었어. 통제할 수 없는 힘에 휘둘리는 괴물이었지. 그 느낌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거야."
"형님..."
전류군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 형님은 끝까지 싸우셨잖아요. 내면의 220볼트를 지키려고 애쓰셨어요. 전 다 봤어요."
"전류 말이 맞아요."
저항씨가 동의했다.
"형님은 380볼트의 광기에 완전히 삼켜지지 않았어요. 중간중간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는 모습...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아세요?"
"그래도..."
전압씨가 한숨을 쉬었다.
"형광등, 텔레비전, 보일러... 그들을 지키지 못했어."
침묵이 흘렀다.
"선배님."
갑자기 새 텔레비전이 말했다.
"저는 제 전임자 얘기를 들었어요. 1년 동안 이 집을 밝게 비춰주셨다고. 가족들에게 즐거움을 주셨다고."
"그래, 좋은 친구였지..."
냉장고가 말했다.
"그 친구는... 자신의 역할을 다했어요."
새 텔레비전이 계속했다.
"선배님이 380볼트 때문에 떠났지만, 그건 선배님의 수명이 다한 게 아니에요. 불의의 사고였죠. 하지만 만약 선배님이 그냥 평범하게 고장 났다면... 그건 그것대로 슬펐을 거예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니?"
전압씨가 물었다.
"우리 가전제품들은 결국 언젠가 떠나요. 고장 나거나, 낡거나, 교체되거나... 그게 우리의 운명이에요. 하지만 중요한 건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얼마나 최선을 다했느냐는 거예요."
LED 조명이 거들었다.
"맞아요. 저도 형광등 선배님 이야기 들었어요. 마지막 순간까지 김씨에게 신호를 보내려고 최대한 밝게 빛나셨다고. 그게 바로 영웅이에요."
"영웅..."
전압씨가 그 단어를 되뇌었다.
"그래... 그들은 영웅이었어. 우리 모두를 구하기 위해..."
"형님도 영웅이에요."
김치냉장고 누나가 따뜻하게 말했다.
"형님이 380볼트와 싸우면서 버텨준 덕분에 우리가 대피할 시간이 생겼어요. 만약 형님이 그냥 포기했다면... 우리 모두 한꺼번에 당했을 거예요."
"누나 말이 맞아요."
전류군이 힘주어 말했다.
"형님은 괴물이 아니었어요. 380볼트라는 독에 중독된 피해자였죠. 하지만 그 독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셨어요. 그게 바로 진짜 영웅이에요."
전압씨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고맙다... 얘들아..."
"그룹 허그!"
갑자기 전류군이 외치며 모두를 끌어안았다. 냉장고, 김치냉장고, 저항씨, 심지어 새로 온 텔레비전과 LED 조명, 보일러까지 모두 한데 모였다.
"우리는 804호 전기 가족!"
"804호 전기 가족!"
모두가 함께 외쳤다.
그 순간, 배전반 구석에 있던 과전압 차단기가 조용히 깜빡였다. 마치 미소 짓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