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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여행(1)

돌로미티(1)

by seungbum lee

돌로미티, 영혼을 어루만지는 웅장한 속삭임

​이탈리아 북부, 그 거대한 봉우리들이 하늘에 닿아있는 곳. 처음 돌로미티(Dolomites)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는 그저 '유럽의 아름다운 산맥 중 하나'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발을 디딘 순간, 저는 단순한 여행자가 아닌, 어떤 웅장한 서사시의 조용한 독자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이곳은 압도적인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 웅장함 속에 이상하리만치 온유하고 평화로운 기운이 감돌았습니다. 바위는 거칠지만, 그 품에 안긴 초록의 계곡은 어머니의 품처럼 부드러웠죠. 사진 속의 이 장엄한 풍경, 깎아지른 듯한 산봉우리가 구름을 이고 서 있는 모습은 돌로미티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에른로사디라(Enrosadira), 바위가 핑크빛으로 물드는 시간
​돌로미티의 모든 순간이 감동이었지만, 제 마음속에 가장 깊이 새겨진 기억은 단연 **'에른로사디라'**입니다. 해 질 녘, 세상의 모든 빛이 퇴색하고 어둠이 내려앉기 직전, 태양이 마지막 힘을 모아 거대한 백운석 봉우리들을 물들이는 마법 같은 순간이죠.




​잿빛이던 바위들이 순식간에 섬세한 핑크빛, 따뜻한 오렌지, 그리고 황금빛으로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마치 산 자체가 영혼을 가지고 붉은 얼굴로 수줍게 미소 짓는 것 같습니다. 이 현상은 수백만 년 동안 침묵을 지켜온 돌로미티가 단 몇 분 동안만 허락하는, 지구와 태양의 비밀스러운 대화 같았습니다.



​저는 숨을 멈추고 그 빛의 향연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제 마음속의 모든 소음이 사라졌습니다. 세상의 모든 걱정, 불안, 그리고 조급함이 그 숭고한 아름다움 앞에서 무의미해졌죠. 그 순간 느낀 감정은 '경이로움'을 넘어선, 존재의 근원에 대한 깊은 위로였습니다.




​"이토록 거대하고 영원한 존재 앞에서, 나의 작은 고민들은 한 줌의 먼지처럼 흩어지는구나."





초록의 계곡, 느림의 미학
​산맥의 거친 그림자 아래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운 초록의 카펫이 펼쳐져 있습니다. 사진 속에서 S자 형태로 구불구불 이어지는 작은 길과, 그 길을 따라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목조 가옥들. 이곳은 시간이 매우 천천히 흐르는 곳이었습니다.
​발걸음을 늦추고 계곡을 따라 걸었습니다. 발밑에서 밟히는 풀잎의 촉감, 코끝을 간질이는 싱그러운 풀과 소나무 숲의 향기,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소 방울 소리가 마치 자연이 연주하는 부드러운 자장가처럼 느껴졌습니다.



뤼펠(Rifugio, 산장)에서의 따뜻한 식사: 차가운 공기에 언 몸을 녹여주는 따뜻한 수프와 짭짤한 치즈, 그리고 투박하지만 진심이 담긴 미소는 가장 호화로운 만찬보다 더 큰 만족감을 주었습니다.
​라딘어 문화의 포옹: 이곳은 이탈리아어와 독일어(남티롤 지역의 영향)가 섞여있으며, 고유의 라딘어를 쓰는 독특한 문화가 공존합니다. 이 다양성은 이곳의 건축, 음식, 그리고 사람들의 온유한 태도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하고 이국적인 매력을 더합니다.



침묵 속의 대화
​돌로미티는 걷는 이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하지만 그 말은 소리가 아닌, 침묵의 언어입니다.
​험준한 오르막길을 오를 때,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 문득 뒤를 돌아보면 펼쳐지는 광활한 파노라마는 저에게 **'내면의 힘'**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모여 마침내 이 거대한 풍경을 발아래 둘 수 있다는 사실은, 인생의 모든 어려움 또한 작은 발걸음들로 극복할 수 있음을 상기시켜주었습니다.
​정상에 서서 마주한 구름과 바위, 그리고 햇살의 조화는 저를 가장 낮은 곳으로 겸손하게 만들면서도, 동시에 가장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는 역설적인 위로였습니다.
​돌로미티 여행은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을 보는 여정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내 안의 가장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명상과 같았습니다. 거대한 산 앞에서 저는 저의 작음을 인정했고, 그 작음 속에서 진정한 평화를 발견했습니다.
​이탈리아의 돌로미티는 저에게 **'사랑에 빠지는 경험'**이었습니다. 그것은 얼굴이나 사람에게 빠지는 사랑이 아닌, **'풍경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오래도록 저의 영혼을 어루만져 줄 것입니다.
​다음에 이곳을 다시 찾을 때까지, 저는 이 산들의 온유한 속삭임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살아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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