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가을들녘

추억

by seungbum lee

가을은 때때로 마음 속 오래된 서랍을 천천히 열어 놓는다.
바람이 익은 이삭 사이를 스칠 때, 이름도 없이 흩어진 기억들이
살랑살랑 깨어나 나를 불러낸다.

한때 나는 이 길을 매일 걸었다.
들녘은 지금처럼 황금빛으로 익어 있었고,
발밑의 흙은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서툴렀지만,
무엇이 소중한지 적어도 한 가지는 알고 있었다.
누군가의 웃음, 때맞춘 손길,
그리고 계절이 건네는 조용한 위로.



이제는 그때의 나는 없고,
그 시절 함께 걷던 사람도 이곳에 없다.
하지만 풍경은 변치 않고 제 시간에 돌아온다.
마치 "잊지 않았어" 하고 속삭이듯이.

가을들녘은 자신을 꾸미지 않는다.
천천히 익고, 고요히 누워 있고,
햇빛이 스며드는 대로 그 빛을 받아들인다.
내 마음도 그렇게 익어갔으면 한다.
아무것도 억지로 움켜쥐지 않고,
때가 되면 내려놓고,
다시 때가 되면 무언가를 품을 수 있는 마음.



바람이 살짝 불어오는 오후,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늘 하나 없는 넓은 하늘에
새 몇 마리가 천천히 원을 그린다.
세상은 이토록 단순하게 아름다울 때가 있다.
잠시라도 그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오래된 웃음들.
그 웃음 속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투명했다.
나는 그때의 나를 완전히 잃어버린 게 아니라는 걸
가을이 알려준다.
이 계절은 잊혀진 것을 다시 불러내는
조용한 소환사 같다.

나는 오늘 가을들녘 위를 천천히 걸었다.
걷는 동안 마음은 조금씩 가라앉고
감정은 고요한 호수처럼 반짝거렸다.
내 안에 아직 남아 있는 따뜻함이
바람결에 따라 살며시 흔들렸다.



돌아오는 길,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참 좋았구나. 그리고 지금도 좋구나."
지나는 계절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나를 또 한 번 깊어지게 한다.
가을이 와서 고맙다.
내 안에 남아 있는 모든 옛 기억들이
부드럽게 웃고 있는 것 같았다.

keyword
월, 금,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