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면 너랑은
별로 친해질 이유도 없었는데
뭐였을까
넌 키 크고 잘 생기고 목소리 굵고 운동도 잘했고
난
교실구석 뚱뚱한 안경잽이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보려는 너의 배려였을까
여전히
네가 나와 친해지게 된 계기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네 말대로
난 예측불허에 말 꼬투리 잡기 좋아하고
뱀처럼 차가운 인간이었는데
왜 그토록 하교를 같이 하고
비를 많이 맞고 다녔을까
연초에 네 상황을 듣고 제일 먼저 떠올랐던 건
둘이서 한 밤 중에 칼바람을 맞으며 걷던 안면대교
네 입대 전,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여행을 떠났고
막차를 놓친 후 다리를 걸어서 건너자고 했던 만용
이대로 가다간, 바람에 날려 차도로 휘말리게 될 텐데,
걱정했지만
우연히 만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해수욕장에 도착해서는
어떻게든 다 잘 풀리게 되었었을 거라 킬킬대며
실컷 웃고 마시다가 잠에 들었다
그래서,
같이 여행을 한 번 더 하고 싶었다.
추억을 쌓고 싶은 마음도 없진 않았지만,
네가 가는 길을 그냥 군대 가는 길 정도로 치부하고 싶었다.
이번에도 어떻게든 잘 풀리게 될 거라고
믿고 싶었다.
조금 더 마음 편하게 살고자 하는 너에게
왜 나는 그런 욕망조차 비워야 한다는 얘길 하지 못했을까.
왜 그 나라에 가지 말라고
좀 더 강하게 만류하지 않았을까
대기업의 온실 속에서 보호받고 성장했던 네가
낯선 나라에 나동그라지면서
세 아이의 아빠로서 맨 땅에 헤딩하는 것이
심장에 굳은살이 천천히 박이던 나의 20대보다 훨씬 힘들 거라는 걸
난 왜 예측하지 못했을까
누구보다 배려심 많고
누구보다 젠틀하고
누구보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생각하는 네가
배려 없고 예의 없는 인간에 대한 분노가 누구보다 심했다는 걸
자신의 평온을 위해 시선을 돌리는 걸 하기 힘든 녀석이었다는 걸
왜 나는
잊고 있었나
너와 나의 공통점
잔소리를 하기도 듣기도 싫어한다는 점
지긋이 옆에서
지켜보고 응원해 주는 게 친구라고 생각했던 점
그래서인지 너랑은 흔한 싸움 한 번 한 적 없었다
서운해한 적은 있었겠지만
큰 소리, 싫은 소리 낸 적 없었다.
그렇게 비등점 아래의 미지근한 온도로
말랑말랑하지만 끊어지지 않을 우정을
이제껏 이어올 수 있었다.
하지만 후회한다
널 좀 더 강하게 말리지 못했던 걸
네 걱정을 듣고
좀 더 든든하게 지탱해 주지 못했던 걸
하다가 힘들면
빠꾸
라고 시원하게 말해주지 못했던 걸
잔소리를 하는 데엔 자격이 필요한 게 아니라
상대의 두꺼운 가드를 내려줄 기술과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걸 왜 몰랐을까
이제는
안식에 이르렀기를 바란다
남겨진 사람들은 또 남겨진 사람들의 삶을 살아갈 것이고
하나님의 은총이 되었든
사람들의 친절과 배려가 되었든
자신들만의 끈질긴 생명력이 되었든
그들과 함께 삶을 이어나가게 될 테니
이젠 그만
평안해라, 친구야
내 형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