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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선 Sep 18. 2021

억만장자와의 만남

예전에 L 마트에서 컴퓨터를 고치던 어느 주말, 오래간만에 컴퓨터 매장에 아무 매니저도 일하지 않던 날이라서 모처럼 편하게 하루를 보내려고 했는데, 마침 옆 동네 지점에서 전화가 와서는, 자기네 수리 기사가 휴가를 가서 그러는데, 손님을 한 명 보낼 테니 컴퓨터 수리를 빨리 좀 해줄 수 없겠냐고 한다. 그 손님이 누군지도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당시에는 아직 영어를 제대로 못 알아들어도 오케 오케 하며 알아들은 척하던 나쁜 습관이 남아 있었다. 사실, 뭐 원래는 그렇게 순서를 어기고 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이웃 지점의 매니저가 특별히 전화를 걸어 부탁을 한 것도 있어서 뭐 단골손님이겠거니 하며 그러자고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어떤 할아버지가 노트북 컴퓨터를 들고 와서는 메모리 업그레이드와 컴퓨터 청소를 그날 하루 안으로 끝내 달라고 한다.


아놔... 특별히 부탁을 받아서 예외적으로 순서를 건너뛰고 해주는 건데, 이렇게 당당하게 하루 안으로 끝내 달라고 하면 이쪽에서도 마음이 좀 상한다. 게다가 ‘컴퓨터 청소’라는 두리뭉실한 용어를 쓰면 저 사람이 정확히 뭘 원하는지 알 수가 없다. 경험상 이런 손님들이 나중에 말들이 많다. 뭘 고쳤길래 이렇게 비싼 거냐? 하나도 안 달라졌는데 고치긴 고친 거냐 등등.. 젠장… 까탈스러운 걸로 유명한 손님이라서 옆 지점에서 보낸 건가??


나 : 컴퓨터가 무슨 문제가 있는데요?
노인 : 그냥 메모리 업그레이드랑 청소만 해주면 되는데…
나 : 무슨 문제가 있는 건데요?
노인 : 좀 느려서….
나 : 잠시 체크 좀 하겠습니다.


노트북 전원을 켜고 천천히 체크를 한다. 가끔은 전혀 다른 이유가 원인이 되어서 느려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손님에게 어떤 수리를 할 것인지 미리 얘길 해둬야 하기 때문이다. 노인은 손목시계를 쳐다보는 둥 바쁜 척을 한다. 뭐.. 그래 봐야..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보아하니 그리 안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3~4년 정도 된 구형 노트북이고 여기저기 깨진 자국도 있는 데다가, 바이러스 방지 프로그램들이 시스템 리소스를 어느 정도 차지하고는 있지만.. 애초에 구형 노트북으로는 충분히 할 일을 하고 있는 걸로 보였다. 램 메모리도 이미 768메가나 있다 (2004년 모델로는 제법 높은 램 용량이었음) 이 컴퓨터가 느린 것은 아마도 하드 디스크가 노후되었거나 정리가 안되어서 그런 것일 거라는 판단이 들었다.


나 : 보니까 램 메모리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요. 아마도 메모리를 업그레이드해도 많이 빨라지지는 않을 겁니다.
노인 : 그냥.. 해달라는 대로 메모리 업그레이드해줘요.
나 : (무시당해서 기분이 상했다) 그러죠 머.
노인 : 그리고 청소 (Cleaning) 도 해주고요.
나 : 근데.. 아직 청소를 뭘 해달라는지 이해가 안 가는데.. 스파이 웨어를 없애 달라는 건가요? 아니면 레지스트리를 청소해달라는 말씀인가요?
노인 : (전문 용어에 좀 주눅이 들었다) 뭐 이것저것..
나 : (한숨..) 그러죠 뭐..


뭐 이런 거야.. 늘 있는 일이지.. 노인들 상대로 컴퓨터 수리를 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이 바탕화면 그림을 제대로 유지하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을 정도로 경험이 있었던 때였다. 구체적으로 눈에 보이는 고장이 없는 컴퓨터를 고치는 일이 답답한 일이기는 하지만, 성능을 어느 정도 높여주기만 하면 딱히 크게 문제를 일으킬 것 같지도 않았다. 근데.. 가만있자 어떤 튠업을 하고 얼마나 성능을 올려야 이 양반이 빨라졌다고 생각할 수 있으려나? 일단 노트북을 맡아서 자세한 점검을 하기로 했다.


노인 : 내 개인 정보 필요하죠?
나 : 네


당시 L 마트에서 수리를 위해서 컴퓨터를 맡게 되면, 소유주의 이름, 주소, 연락처를 받고, 만일의 상황에 대해서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서명을 받게 되어 있었다. 일종의 법정서식이어서 반드시 신분증과 동일한 이름과 주소가 필요했다. 근데, 신분증이 아니라 무슨 사원증 같은 걸 던져준다. 우리 회사 카드다.. 흠 직원이었군.. 근데 회사 카드 모양이 이상하다. 회사 이름이랑 자기 이름만 크게 있고, 무슨 직책인지도 없고 사진도 나와 있지 않다.


나 : 이게 뭔데요?
노인 : 내가 이 회사 소유주거든..
나 : (!!!!!) 그래요? 알았으니까 어쨌든 이름하고 주소랑 전화번호 줄래요?


이런 젠장.. 왕회장이었구먼.. 나름 의연하게 대처를 하긴 했는데…


노인 : 전화번호는 XXX-XXXX이고... 주소는 회사 주소를 쓰면 돼요 (명함을 던져주면서) 여기 있어요.


명함을 보니 CEO / President라고 되어있다. 쩝


뭐… 냉큼 받아서 메모리 업그레이드해주고, 애드웨어 / 스파이웨어 죄다 잡아주고, 하드 드라이브 정리해주고… 키보드 사이에 낀 먼지까지 (알아서!!) 다 청소를 해주었다. 하. 지. 만… 도대체 어떻게 수리비 청구를 해야 하는지 알 길이 없어서, 마트 부지점장(지점장은 휴일)한테 물어보러 갔더니 당장 난리가 난다. 창업주의 상속자가 왔으니… 뭐 그래도 회사가 들썩들썩하는 정도는 아니고, "너 직접 만나 본 거야?", "얘기도 해봤어?" (컴퓨터를 찾아간 후에도) "현금으로 내디, 카드로 내디?", "플래티넘이디, 골드 카드디?", "무슨 차 몰고 왔는지 봤어?" 이런 귀여운 수준이다. (결국 직원할인을 해주는 걸로 마무리!!)


일을 모두 마치고 정신을 좀 수습해보니.. 언젠가부터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한국과 비교를 하는게 좀 의미없다고 생각해서 의식적으로 안하려고 노력하지만, 이게 만일 한국 회사에서 일어났다면 어떻게 다를까라는 생각을 또 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우습다. 왕회장 정도 되는 인간이 3~4년 된 구형 컴퓨터를 시장바구니에 직접 들고 다니는 것도 웃기지만, 옆 지점에서도 굳이 전화를 해서 먼저 끝내 달라고 부탁을 한 거 보면 왕회장이라는 걸 알았다는 얘긴데, 회사차원에서 움직이지 않고 당사자한테 직접 다른 지점으로 들고 가보라고 돌려보냈다는 사실도 웃기다. 뭐 물론 말하는 싸가지나 행동거지는 안하무인이지만, 차림새나 타고 다니는 차는 아무리 좋게 봐도 동네 노인네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엇이 이런 풍경을 만드는 걸까… 무엇보다, 경영과 소유의 엄격한 분리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닌가 싶다. L 마트의 왕회장도 창업자의 아들이고, <레고> 및 다른 유수 세계 기업들의 대표도 모두 창업자의 아들인데, 삼성전자 이재용이 지 아버지와 할아비가 물려준 회사를 가지는 것이 뭐가 불만이야…라고 말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적어도 L 마트의 왕회장은 그냥 창업주의 후계자라는 상징적인 의미만 가지고 있고, 대외적으로 회사를 대표하는 이미지로서 활동할 뿐이었지 모든 경영과 관리와는 상관없다는 점에서, 자신의 왕국의 통치권을 대대로 세습하는 삼성가와 다른 것이다.


이 일이 있기 몇 해 전에도, 동네 광역 지방의원 (MLA)이 L 마트로 직접 컴퓨터를 들고 왔던 적이 있었다. 문제가 있는 노트북을 들고 와서는 수리비가 얼마쯤 들 것 같은지.. 좀 깎아줄 수 없는지.. 새로 노트북을 사면 얼마 정도 비용이 들 것 같은지를 한참 꼼꼼히 물어보고는, 거듭 한숨을 쉬며 돌아갔었다. 물론 자세한 속사정은 알 수가 없는 일이긴 했다. 그리고, 밴쿠버 사람들도 정치가들이나 부자들에 대해 그리 좋은 인상으로만 보지 않는 편이다. 그렇지만, 그 당시 내가 보기엔 ‘그래도.. 이 정도만 해도..’라고 느껴졌던 것은 기쁜 일인지 슬픈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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