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 앞에서
사람의 말은 언제나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말은 공기 중에 흘러가지만, 듣는 이의 마음속에서는 각자의 경험과 관점이라는 필터를 거쳐 의미가 달라진다.
아이의 “오늘은 웃고 싶지 않아요”라는 말은 그저 반항일 수도 있고, 사실은 위로가 필요한 신호일 수도 있다. 똑같은 말이지만, 듣는 이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결국 말의 진실은 그 자체보다, 그것을 어떻게 읽고 받아들이는가에 달려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해석의 책임을 갖는다. 말과 행동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상대의 마음을 닫게도, 열게도 만든다.
“말은 그대로가 아니라, 해석을 통해 의미를 얻는다. 그리고 그 해석은 우리의 책임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대표작 《이미지의 배반(The Treachery of Images, 1929)》을 처음 보면 당혹감이 앞선다. 화폭에는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파이프가 그려져 있다. 그런데 그 아래에는 “Ceci n’est pas une pipe(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이 적혀 있다. 그림을 보는 순간 우리는 혼란에 빠진다.
분명 파이프 같은데, 파이프가 아니라고? 그러나 마그리트의 의도는 분명하다. 그것은 진짜 파이프가 아니라 ‘파이프 그림’일 뿐이고, “파이프”라는 단어 역시 실체가 아니라 단지 사물을 가리키는 기호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이 작품은 언어와 이미지, 그리고 실제 사이의 간극을 드러낸다. 말은 언제나 실체를 대신하는 부호일 뿐, 그 자체가 실재는 아니다. 우리는 “사랑해”라는 말을 듣지만, 그 말이 사랑의 전부는 아니다. “괜찮아”라는 말 역시 누군가의 고통을 온전히 담을 수는 없다. 결국 말은 실체가 아니라 그림자, 하나의 표식에 불과하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실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은 여전히 삶을 바꾸는 힘을 가진다는 점이다. 마그리트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선언했지만, 우리는 그 문장을 보는 순간 ‘사물과 언어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즉, 말은 진실을 담지 못하면서도 여전히 우리의 사고와 감정을 움직이는 힘을 발휘한다.
돌아보면 나의 삶에서도 그러했다. 교실에서 아이가 무심코 내뱉은 “오늘 학교 정말 오기 싫었어요.”라는 말은 나를 멈추게 했고, 한 지인이 건넨 “당신은 잘하고 있어요”라는 짧은 격려는 오랫동안 나를 붙드는 힘이 되었다. 독자가 “이 책이 제게 큰 위로가 되었어요”라고 남겨준 한 문장은 펜을 다시 잡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말은 실체가 아니지만, 그 어떤 위로보다 깊이 내 삶을 바꾸어왔다.
마그리트의 그림은 말과 이미지가 실재를 배반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지만, 나는 그 배반을 통해 오히려 말의 힘을 더 깊이 느낀다. 말은 완벽하지 않다. 때로는 왜곡되고, 때로는 오해를 낳는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 조심스럽게, 더 따뜻하게 말을 고르려 애쓴다.
“말을 관리하면 인생이 바뀐다. 오늘의 말이 내일의 나를 만든다”는 문장은 바로 그런 깨달음을 압축한다.
말은 실체가 아니다. 그러나 그 말이 건네지는 순간, 삶의 무늬가 달라진다. 마그리트의 그림 앞에서 나는 다시 다짐한다. 나의 말이 누군가의 마음을 밝히는 등불이 되기를, 내일의 나를 단단히 세워주는 씨앗이 되기를.
나는 최근 누군가에게 어떤 말을 들었을 때 마음이 크게 움직였는가? 그 경험은 내 삶에 어떤 변화를 만들었는가?
내가 무심코 던진 말이 누군가에게 상처나 위로가 되었던 기억이 있는가?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말은 무엇인가? 그 말을 스스로에게 건네본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