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4섬’ 전남 ‘신안’하면 연상되는 이미지가 무엇일까. 누구는 1975년에 한 어부의 그물에 걸린 중국 원나라 시대의 보물선을 떠올릴 테고 누구는 광활한 갯벌과 태평염전의 소금을 내세울 것이다.
예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한민국에서 그림값이 가장 비싼 단색화의 거장 수화(樹話) 김환기의 고향이라는 점을 거론하지 않을까. 신안 바다는 김환기 그림의 모태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신안 안좌도에서 컸던 김환기는 고향 바다에서 그만의 심오하고 매혹적인 푸른색을 찾았다. 이른바‘환기 블루’다. 고흐의 파란색이 지중해 바다에서 볼 수 있는 짙고 깊은 파란색이라면 ‘환기 블루’는 신안 앞바다의 담백하고 우아한 파란색이다.
김환기가 그 파란색으로 광대한 우주의 신비와 고요를 표현한 대표작 ‘우주’는 2019년 홍콩 크리스티 경매사에 작품이 출품돼 132억에 낙찰됐다.
‘김환기’라는 대가를 배출한 신안군은 ‘예술의 섬’을 추구한다. 핵심 키워드는 ‘One&Only’ ‘1섬 1정원’ ‘1섬 1뮤지엄’ ‘문화예술’이다. 이렇게 완성된 섬이 ‘퍼플섬’(반월·박지도),‘수선화의 섬’(선도), ‘순례자의 섬’(기점·소악도), ‘맨드라미의 섬’(병풍도), ‘수국·팽나무의 섬’(도초도), 목련의 섬(자은도) 등 11개다.
지난 28일 마힐로가 ‘순례자’처럼 병풍도와 기점도를 걷기 위해 한땐 섬이었던 신안군 증도면 지신개선착장에서 여객선을 탔다. 그동안 숱하게 섬 트레킹을 했지만 이번처럼 말끔하게 단장된 여객선은 처음이다.
2층 객실은 창문 밖을 통해 바다 풍경을 감상하며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카페처럼 좌석과 탁자를 배치했다. 여객선조차 글로벌 관광지로 발돋움하기 위한 전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점점이 떠있는 섬과 바다를 바라보며 불과 25분 만에 병풍도 보기선착장에 도착하니 가을 햇볕이 강렬했다. 완연한 가을로 접어드는 9월 하순이지만 하늘은 여전히 여름을 품고 있었다.
보기선착장에서 셔틀버스로 7분 거리의 언덕에 절정을 살짝 지난 맨드라미 군락이 바다를 향해 미모를 뽐내고 있었다. 섬 주민들이 3년간 황무지 야산을 개간해 일군 수천 평의 꽃밭이다. 보기선착장에서 안내를 맡은 한 주민은 올해는 폭염 때문에 '때깔'이 작년보다 못하다고 했지만 아쉬울 정도는 아니었다.
지붕이 온통 핑크빛인 고즈넉한 마을을 지나 노두길로 연결된 대기점도에서 본격적인 순례가 시작된다. 이 길의 포인트는 ‘12 사도 순례 예배당’이다. 프랑스 장 미셸, 스페인 브루노, 한국의 손민아 등 작가 10명이 참여해 대기점도~소기점도~소악도까지 12㎞에 달하는 순례길 바닷가, 마을 입구, 숲 속에 작은 집을 지었다.
대기점도를 가려면 모세의 기적처럼 물이 차면 길이 사라졌다가 물이 빠지면 드러나는 결코 짧지 않은 노도길을 걸어야 한다. 혹시라도 밀물이 될까 걱정돼 미리 증도면 병풍도 출장소로 연락했더니 다행히 이날은 썰물 때였다.
노도길이 건너자 정자 옆에 ‘생각하는 집(안드레아)’이 보였다. 해와 달의 공간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이어 시계 반대 방향으로 그리움의 집(야고보), 행복의 집(빌립), 생명평화의 집(요한), 건강의 집(베드로)을 차례로 순례하다 보면 대기점도를 한 바퀴 돌게 된다.
그리고 그 길 사이에는 고양이들이 자유롭게 뛰노는 마을(이 섬은 일본의 고양이섬 아오시마처럼 고양이가 주민보다 많다. 그 섬 관광객들은 고양이들과 놀면서 힐링을 한다)과 맨드라미 꽃밭, 미술관, 조용한 숲을 지나게 된다.
‘행복의 집’ 뒤편엔 짧은 노도길이 소기점도로 연결돼 인연의 집(토마스), 감사의 집(바르톨로메오), 기쁨의 집(마태오)까지 둘러볼 수 있다. 하지만 나머지 소악도와 진섬에 있는 4개의 집까지 하루에 찾아가는 것은 무리다. 왕복 24km에 달하는 먼 길이기 때문이다.
우린 여객선 예약시간 때문에 소악도 앞에서 발길을 접고 왕복 12km를 걸었다. 일부 회원은 병풍도 섬에서 승용차를 빌려 '칭찬의 집', '사랑의 집', '소원의 집'을 거쳐 진섬 끝에 있는 '지혜의 집'까지 둘러보는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12개의 집들을 지은 이들은 모두 건축가가 아니다. 설치미술가, 조소작가, 조형작가, 건축물제작 예술가, 서양화가 등이다. 그래서 이들은 건축설계의 메커니즘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껏 상상력을 발휘했다.
‘순례자의 섬’을 트레킹의 성지인 스페인 산티아고에 빗대 ‘섬티아고’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사이즈도 풍경도 다르다. 이 길은 짧지만 나름 독특한 개성과 고유한 정취가 있다.
신안군의 '예술 섬' 프로젝트가 안도 다다오 건축물과 이우환 미술관, 쿠사마 야오이 호박조형물로 세계적 관광지로 부상한 일본 세토내해 ‘나오시마’를 벤치마킹했지만 병풍도와 기점도, 소악도가 나오시마가 아니듯 ‘순례자의 섬’은 ‘예배당’이라는 공통점을 갖춘 ‘건축미술’과 ‘걷기 길’이라는 정체성을 갖추고 있다.
‘순례자의 길’은 종교적 편향성을 갖춘 코스라는 지적 때문에 진통을 겪기도 했지만 보는 시각에 따라 얼마든지 달리 생각할 수도 있다. '명산대찰'을 찾아다닌다고 모두 불교신자는 아닐 것이다.
어째 보면 이 길은 평이한 섬 둘레길을 감성을 자극하는 사색의 길로 인도한다. 걷다 보면 섬의 풍경도 새롭게 보인다. 종교를 떠나 푸른 바다에 접한 미니 ‘예배당’의 작은 공간에서 잠시라도 명상에 잠기며 사랑하는 이를 위해 기도한다면 그 또한 의미 있는 순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