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성리학의 거두 퇴계 이황은 산 이름도 바꾸었다. 충북 제천 청풍에 있는 금수산의 옛 이름은 백운산이다. 하지만 단양군수로 부임한 퇴계는 이 산에 올라 절경에 감탄사를 토해냈다. "비단에 수놓은 것처럼 아름답다" 백운산이 금수산(해발 1016m)으로 바뀐 사연이다.
단양 적성면과 제천 수산면에 걸쳐 있는 금수산은 골이 깊고 폭포와 기암절벽이 절경을 이룬다. 정상에 서면 청풍호수가 한눈에 펼쳐진다. 아름다운 산의 조건을 다 갖추었다.
특히 깊은 계곡의 한양지(寒陽地) 유곡 양편에는 마치 층층이 쌓인 괴석과 소나무 우거진 숲 사이 십리 계곡에 차고 맑은 계류가 굽이치고 돌아 흐르는 능강구곡이 있다. 자드락길 3코스 얼음골 생태길(6km)은 바로 능강계곡을 걷는 코스다.
얼음골 생태길은 자드락 2코스 정방사길과 접해있다. 능강교에서 하차하면 바로 갈림길이 보인다. 들머리는 계곡을 끼고 있는 숲이 우거진 평탄한 오솔길이라 그늘이 짙었다. 조그마한 돌을 하나하나 쌓아놓은 돌탑 수십 개가 나그네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짙은 초록 숲길에 살랑살랑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산길옆으로는 단풍나무가 사열하듯 서있었다.
가을에 걸어도 좋을 듯싶었다. 중간중간 나타나는 계곡은 순하다. 산속으로 들어갈수록 계류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흘렀다. 대청마루처럼 넓은 바위에는 산행하다 말고 아예 돗자리를 펴놓고 책을 읽는 등산객도 보인다.
본격적인 트레킹은 취적대부터 시작된다. 한낮에도 어두운 취적대의 깊은 소(沼)는 바닥의 자갈모양까지 선명하게 보일만큼 투명했다. 만약 선녀가 목욕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다가 나무꾼에게 옷을 잃어버렸다는 설화가 사실이라면 나는 이곳일 것이라고 믿고 싶다. 목욕하던 선녀는 달빛에 비친 비경에 취해 옷을 훔쳐가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이제부터 계곡트레킹의 진가를 보여주는 곳이다. 지금까지 흙길이었다면 이곳부터는 거친 돌길이다. 평지의 부드러운 트레킹을 기대했던 사람들에겐 진땀깨나 흘리는 길이다. 더구나 오르막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전혀 가공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계곡길이 펼쳐진다. 질박한 길이다. 울퉁불퉁한 돌길옆에는 매 순간 독특한 정취를 자아내는 계곡이 시각과 청각을 흔들어놓는다. 길을 걷다가 맘에 드는 너른 바위에 배낭을 풀고 굉음을 내며 아래로 쏜살같이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유유자적 정담을 나누거나 간식을 먹는 사람도 많았다.
어차피 금수산 정상에 오르려고 온 것이 아니다. 얼음골이라는 목적지가 있지만 꼭 그곳에 빨리 가야 할 할 이유도 없다. 걷고 쉬면서 자연을 음미하는 것이 더 소중하다. 얼음골 생태길은 그래서 더 매력적이다.
얼음골은 금수산 7부 능선에 있다. 계곡이 끝날 때쯤 물대신 바위로 빼곡히 채워진 계곡이 나온다. 마른 계곡이다. 깊은 골짜기에 엄청난 돌무더기가 쌓여있는 광경은 색다르다. 그 가파른 골짜기에 오르면 생뚱맞게 콘크리트로 무대 같은 인공구조물을 설치해 놓고 한가운데 마루를 갖다 놓았다. 그곳에 올라서면 한여름 햇볕이 직각으로 쏟아진다.
바로 그 너머에 얼음골이 작은 움막 안에 있다. 안내판에는 돌무더기를 40cm가량 들추면 밤툴만 한 크기의 얼음덩어리가 쏟아진다고 쓰여있지만 보지는 못했다. 여름의 절정에만 볼 수 있는 현상이라는데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얼음골 돌무더기 속에서 마치 에어컨처럼 서늘한 바람이 흘러나와 더위를 식혀준다.
금수산 얼음골은 산 그늘지고 물 굽이진 고즈넉한 산골짜기다. 함께 걸은 지인에 따르면 조선후기 문인 옥소(玉所) 권섭(權燮 1671~1759)이 이곳 능강동(凌江洞)에 거연재(居然齋)와 만풍각(晩風閣)을 짓고 머물렀다고 한다.
이곳이야말로 한적하게 말년을 보내며 편히 쉴 곳이라며 터를 잡은 것이다. "이 몸이 이 세상에 붙어사는 것도 아직 깨지 않은 꿈"이라며 능강동의 모습을 그리고 그림 속엔 "내 사는 곳이 마치 그림 같다(吾居如畵圖中)"는 글귀도 써놓았다고 한다.
얼음골 생태길은 왕복 11km다. 보통 평지의 도보여행길은 이 정도면 3시간 안쪽에 다녀올 수 있다. 하지만 이곳은 길이 거칠고 좁은 데다 오르막이 있는 계곡길이라 대략 중간에 쉬며 걸으면 4시간 이상은 잡아야 한다. 빨리 걷는 것보다는 여유 있게 걷는 것이 트레킹의 묘미를 느낄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