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껏해야 시립공원이다. 그것도 작년까지는 40년간 군립공원이었다. 그렇다고 해발 711m 수준이라 높고 웅장한 산이라고 할 수도 없다. 하지만 선계(仙界)에서나 볼 것 같은 기이한 경관만큼은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는 ‘전국구’다. 경북 포항 내연산 청하골 12폭포길 이야기다.
8년만에 내연산 트레킹에 나섰다. 첫 걸음의 여운이 오랫동안 남았으나 단체로 걷기엔 들머리의 보경사 입장료(3500원)가 만만치않았다.(어차피 들리지도 않을 사찰 입장료를 내는것도 아까웠다). 다행히 지난 5월부터 사찰문화재관람료가 폐지되면서 폭우와 폭염으로 점철된 올 여름의 대미(大尾)를 산뜻하게 장식하기 위해 지난 주말 내연산 골짜기를 찾았다.
처서가 지난지 나흘이 됐지만 기온은 30도 안팎에 하늘을 바라보니 눈을 뜨지못할 만큼 쾌청했다. 하지만 계절을 이길 장사는 없다. 보경사를 지나 물속 바닥이 투명한 에메랄드빛 갑천계곡으로 접어들자 시원한 산들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속담처럼 내연사 걷기 길도 달라졌다. 보현폭포를 지나 보현암 방향으로 600m를 올라가면 5년전에 설치된 소금강(小金剛)전망대가 나온다. 이 곳에서 바라보는 전망은 금강산 못지않은(18년전 주마간산(走馬看山)격이지만 금강산을 다녀왔으니 비교할 자격이 있다) 절경이다.
그래서 등산이 아닌 트레킹을 위해 오는 탐방객들은 보현사를 들머리로 상생폭포~보현폭포~소금강전망대~은폭포~관음폭포~연산폭포~보현폭포~보현사로 원점회귀코스로 걷게 된다.
소금강전망대로 올라가는 길은 가파르지만 그리 길지는 않다. 보현암에서 부지런히 걸으면 20분만에 당도한다. 굴참나무와 물푸레나무, 작살나무와 병꽃나무 숲길을 지나 산허리 전망대에 서면 포항시가 왜 이곳에 거금 2억원을 들여 타원형 돌출전망대를 설치했는지 알 수 있다.
풍광이 예사롭지 않다. 정면으로 신일암으로 불리는 깎아지른듯한 절벽위에 정자가 사쁜히 걸쳐있는 풍경이 진경산수화를 직접 목도하는듯 하다. 아래엔 연산폭포의 물줄기가 쉴새없이 쏟아지고 있다. 탐방객들이 반드시 인증샷을 찍는 ‘포토존’이다.
다시 길을 나섰다. 산아래 은폭포로 오솔길이 이어진다. 은폭포 주변은 8년전과 확실히 달라졌다. 그때 기억으론 폭포주변엔 모래사장이 있었지만 지금은 온통 삐죽삐죽한 바위로 뒤덮였다. 은폭포앞까지 가려면 바위를 타넘기 위해 정신을 집중해야 할만큼 스릴만점이다. 아마도 어느 해 태풍과 장마로 계곡이 뒤집어졌을 것이다.
은폭포에서 유턴해 관음폭포로 가는 도중 선일대로 올라가는 테크계단이 나왔다. 일행중 호기심이 많은 몇명은 283m 높이의 선일대로 올라갔지만 나머지는 관음폭포로 직진했다. 관음폭포는 그동안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했지만 시간이 정지된듯 이곳은 예전 그대로였다.
넷플렉스 드라마 ‘킹덤’에 등장했던 무시무시한 동굴도, 연산폭포로 향하는 하늘색 구름다리도, 하더 못해 파란하늘도 여전했다. 바뀐것이 있다면 그 사이에 주름살이 늘어난 나뿐이었다. 연산폭포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누군가 내려오면서 “이제껏 본 폭포중에서 가장 멋졌다”고 했다.
‘압도적인 풍광’ 이란 이럴때 쓰는 말이다. 폭포에 다가서자 엄청난 규모와 굉음에 말문이 막혔다. “먼 길 하얀절벽이 좌우로 옹위하며 서있고 천 척 높이 폭포수가 날아 곧장 떨어져 내렸다. 아래에는 신령스런 못이 있어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사다리로 올라보니 선계에 앉은듯해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카메라를 든 여행작가가 연산폭포를 묘사한 글이 아니다. 조선중기 문인 서사원이 내연산을 방문해 쓴 ‘동유일록’에 나오는 대목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수록한 그도 연산폭포에 감탄했을 것이다.
이 길은 그리 길지도 험하지도 않다. 하지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스크린에 몰입하게하는 블록버스터 영화같은 길, 여름의 끝물에 찾은 내연산 청하골 12폭포는 바로 그런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