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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계획의 5월.

by 새벽별

좋았다. 함께 응원을 해주고 서로의 잘됨을 축하해 주고 축복해 주는 그녀들과의 모임, 그 시간들이. 그녀들과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에너지를 받았고 나도 해볼까 라는 도전과 용기를 갖게 해 주었으니까. 내가 지금보다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고 되어가고 있다고 해주는 그녀들의 기운이 좋았다.



벅찼다. 어느 순간부터 함께 가고 있는 듯 하지만 자꾸 나만 종종거리며 따라가는 것 같아서 힘에 부쳤다. 학처럼 긴 다리로 성큼성큼 그러나 우아함을 포기하지 않고 걸어가는 그녀들과 달리 짧은 다리로 뒤뚱뒤뚱 걸어가는 내 모습에 조금씩 거리가 벌어지는 듯했다.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어 뒤꽁무니를 종종 거리며 쫓아갔다. 넘치는 에너지와 실행력을 원료 삼아 거대한 추진력으로 쭉쭉 치고 나가는 그녀들을 넋을 잃고 바라보기 바빴다. 나도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비교도 할 수 없는 열정에 어느 순간 나는, 우두커니 멈춰 섰다. 그러더니 쪼그리고 앉아 다시 땅을 팔 준비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4월의 한 달 성찰의 시간을 보내고 5월의 계획들이 주르륵 올라온다. 5월.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멈춤이 필요했다. 따라가려 애쓰지도 말고 주저앉아 땅도 파지 말고 그냥 그 자리에 가만히 멈추는 순간이. 그래서 나의 5월은 무계획의 달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 미리 계획 같은 거 세우지 말고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내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기.




책 읽기가 과제가 되어버렸다. ‘그들과 호흡과 발걸음을 맞추기 위해선 한 달에 적어도 8권은 읽어야 해.’ 읽고 또 읽었다. 뒤돌아보니 남는 게 없었다. ‘읽지 말자. 이번 달은 책은 들춰보지도 말자.’라며 내려놓기로 했다. ‘부지런히 살려고 하지 말자. 그냥 되는 대로 살자.’ 아이들이 하교하기 전, 오롯이 혼자 보낼 수 있는 그 시간에 침대와 한 몸이 되어 지냈다. ‘운동 주 3회, 되면 하고 안 되면 말고.’ 금요일 밤 10시 땡! 하면 울리던 알람에 맞춰 예약 어플 위에서 분주했던 손가락의 움직임이 느긋해졌다.


침대와 한 몸이 되어 예전에 보고 싶었던 드라마를 하나하나 정주행 하기 시작했다. 보다가 졸리면 낮잠도 자고, 누워서 아무런 죄책감 없이 쇼츠도 한 시간씩 보고. 문득문득 ‘내가 지금 시간을 이렇게 막 써도 되나.’싶은 마음에 불안하다가도 이번 달은 계획 없이,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지내기로 했으니 괜찮다며 다시 드라마에, 쇼츠에 집중을 했다. 책 한 장도 들춰보지 말자 했건만 이미 책 읽기가 생활이 되어버린 탓일까. 아예 등 돌리기는 되지 않아 읽고 싶었던 소설 위주로 읽었다. 자기 계발서, 자녀교육서 이런 책은 쳐다도 안 보고 아들이 재미있다고 추천해 준 추리소설, 스릴러 소설 위주로 읽었다. 차 타고 30분씩 나가서 운동하는 노력이 헛되지 않게 이를 악물고 운동했었다면 이번엔 설렁설렁 몸이 허락하는 만큼만 움직였다. 계획한 대로 되지 않으면 불안하고 이뤄놓은 성과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초조해하던 나. 그런 나를 조금은 놓고 싶었던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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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그림책 / 5월 한 달 동안 읽은 책 / 막내와 보고 온 공연



그런데 참 이상하다. 책 절대 보지 마! 했던 나의 결심과 달리 이번 달에 책을 6권이나 읽었다. 자투리 시간에 드라마도 보고 유튜브도 보고 쇼츠도 보고, 계획 없이 쓴 것 같은데 미싱 수업을 새롭게 들으며 바지도 만들고 파자마도 만들고 가방도 만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두 번째 그림책도 완성되어 있었다. 운동도 대충 한 것 같은데 지난번에 힘들어서 못 버티고 포기했던 동작들이 어라, 이번 달엔 다 되네? 아무 계획 없이 5월을 보낸 것 같은데 5월 마지막 그녀들과 성찰의 시간을 가지며 나의 한 달을 살펴보니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지키려 아등바등 살았던 그 전의 시간들과 별 차이가 없음을 보게 된다. 게다가 이번 달엔 막둥이와 뮤지컬도 한 편 봤고, 가족과 영화도 두 번이나 봤다.

뭔가 이상했다. 나는 계획 없이 산 것 같은데 내 앞엔 내가 이룬 성과(라고 하기엔 거창하지만 )들이 눈앞에 떡 하니 놓여있었다. 난 분명 아무것도 안 할 거라고 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내가 해 온 것들이 눈앞에 짠 하고 펼쳐져 있다. 왜 그런 걸까.





그녀들과의 켜켜이 쌓아 온 시간의 힘이 아닐까 싶다. 추운 비바람을 견디고 뜨거운 햇살을 견디며 한 줄 한 줄 늘어가는 나무의 나이테처럼 내 삶에도 변화의 줄이 하나씩 그어져 가고 있음을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어깨를 나란히 하지는 못 하지만, 그녀들의 걸음을 종종 거리며 쫓아가고 있었지만 이미 나를 변화시키고 있었던 함께함의 힘. 그 힘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 겹겹이 쌓이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그래서 6월도 큰 계획 없이 지내보기로 했다. 쉬엄쉬엄, 편안하게, 욕심 없이. 그렇게 지내다 보면 6월에도 생각도 못했던 결과들이 내 눈앞에 짠 하고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거대한 성과 말고,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결과 말고 작지만 소중한 나를 나답게 만들어가는 결과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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