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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했던 11월

by 새벽별

큰일이다. 2025년 달력이 딱 한 장 남았다.

12월은 한 해를 마무리해야만 할 것처럼 마음이 숙연해지는 달이라면, 11월은 그 사이 어딘가 애매한 달이다. 끝을 향해 가고는 있지만 아직은 끝이 아닌, 마치 마지막 기회를 줄 테니 계획했던 것들 다시 돌아보고 정리하라고 말하는 듯한 시간.

나는 그 마지막 기회 같은 11월을 어떻게 보냈을까.




아이들과 나들이

이사를 앞둔 요즘, 우리 가족은 ‘이곳에 살 때 가볼 수 있는 곳들 미리 다녀보기’를 작은 목표로 삼았다. 전라도에 14년이나 살았지만, 막상 사람들이 자주 찾는 명소나 관광지는 바쁘다는 이유로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어리다는 이유로, 조금 더 크고 나서는 각자 바쁘다는 이유로, 늘 ‘언젠가’로 미뤄두었던 곳들.

부산에 사는 가족이 해운대에 언제 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을 때 깜짝 놀랐던 그 말처럼, 가까움은 종종 소중함을 흐리게 만든다.

남편과 “우리가 전라도를 떠나면, 다시 여행 삼아 여기로 올까?”라는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결론은 ‘아마 안 올 것 같다’였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다녀보기로 했다.



첫 번째 장소는 광주 민주화운동 기록관이었다. 광주를 그렇게 여러 번 갔으면서도 배경처리 되어 스쳐 지나가기만 했지 제대로 가 본 적은 없었던 곳이다. 지역 특성상 학교에서도 민주화운동을 자주 배우다 보니 아이들도 궁금해했고, 꼭 제대로 알고 기억해야 할 것 같아 주일예배를 마치고 광주로 향했다.

그 시절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공간에 직접 가 보니, 작년 계엄령이 내려졌을 때 왜 그렇게 광주 사람들이 마음이 불안하고 두려워했는지 너무 잘 알 것 같았다. 그 시절 두려움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곳에 가보니 숙연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광주를 시작으로 주말마다 도장 깨듯 여러 곳을 돌아보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쉽지 않았다. 남은 시간이 많지는 않지만, 가능한 만큼 아이들과 더 다녀야겠다.



어쩌다 보니 운동

주 2회씩 다니던 운동 루틴을 주 3회로 늘렸다. 이사 전에 끊어 둔 회원권을 다 쓰려면 주 2회로는 부족하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집 근처에 있는 문화센터에서 필라테스 개강 소식을 듣자마자 고민도 없이 신청을 하게 되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 4회 운동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어쩐지. 엉덩이랑 배가 왜 이리 땡기나 싶었는데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성장메이트 식구들과 한 달을 돌아보기 전까지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라 웃음이 났다. 내가 정신없이 한 달을 보내고 있긴 했구나. 그 정신없음 속에 운동도 한몫했구나 싶었다. 12월에도 주 4회 해야 하는데 나, 괜찮겠지?



배우는 엄마

지난달 둘째 아이 TCI 검사를 했지만 시간이 부족해 자세한 설명을 듣지 못했다. 11월 말 강사님이 다시 오시는데 선착순으로 접수를 받겠다는 말에 듣자마자 냉큼 신청했고, 감사하게도 1:1로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아이에 대해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부분들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고, 앞으로 내가 가야 할 길을 더 단단히 새길 수 있는 시간이었다.

큰 아이 관련 강의도 다녀왔다. 내년이면 중3. 입시 고민은 늘 끝나지 않는 숙제다.

아이들이 선택하고 결정해야 할 순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듣고 배운다.

입시 강의를 들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늘 같다.


'들어도 들어도 어렵다. 그리고 이 복잡한 과정 속을 지나가야 하는 아이들이 참 안쓰럽다. '


900_20250331_093750.jpg <출처: 넷플릭스>


강의를 들으며 문득 깨달았다. 정보를 나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해 줘야 할 일이 있는데 뒤에서 묵묵히 응원하는 엄마가 있다는 것,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안전기지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지금도 잘하고 있고 최선을 다 하고 있는 거 다 알고 있다고. 지금부터 더 자주 더 따뜻하게 말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쉬움

지난달에는 글을 꽤 열심히 썼다. 그 흐름을 이어 이번 달에는 10편 써보자고 작은 목표를 세웠지만 아쉽게도 실패. ‘매일 조금씩이라도 써보자’ 던 다짐도 며칠 만에 흔적 없이 사라졌다.

책상 앞에 앉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다. 12월에는 조금 더 써보면 되니까.

매일의 감정을 기록해 보려는 시도 역시 30일을 온전히 채우지는 못했지만, 지킨 날보다 못 지킨 날이 많았지만, 그래도 순간의 감정을 기록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 남았다.



오늘 하루를 잘 살아내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


11월 한 달을 살아 낸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비록 내가 잘 살고 있는지 돌아볼 여유 없이 보낸 날들이 더 많고 하고자 했던 일들을 다 해내지 못했지만 내 자리에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서 살아냈으니까.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냥 할 수 있는 만큼만 해도 된다는 말을 타인에게는 그렇게도 잘하면서 정작 나에게는 왜 그리도 인색했는지. 11월의 나는 부족해도 성실했고, 흔들려도 꾸준했다. 그래서 이 달은, 잘 살아낸 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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