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그 말이 그렇게 와닿지 않았는데, 지금 와서 돌아보니 확실히 남들은 겪지 않을 범상치 않은 일들이 나한테는 자주 일어났던 것 같다.
그렇다고 뭐 꼭 운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고, 글쎄 뭐랄까, 더 다양한 경험을 해봤다는 게 맞지 않을까? 남들은 못해보는 경험이라니, 얼마나 신나고 흥미진진한지 (라고 합리화해본다)
오늘은 코스타리카에서 새해 해돋이 구경했던 일에 대해 써볼까 한다.
이미 4월쯤 돼서야 묻는 게 웃기긴 하지만, 다들 새해 해돋이 구경은 하셨는지? 하셨다면 어디서 일출을 보셨는지? 흔한 대답은 산이나 바다, 혹은 코로나 판데믹 시대인 만큼 집에서가 아닐까 한다. 나는 한 번, 남들은 상상도 못 할 곳에서 새해를 맞고 해가 뜨는 것을 구경해 본 적이 있다. 코스타리카 굽이진 시골길 위, 고장 난 버스 안에서 추위에 덜덜 떨던 내 위로, 찬란하게 빛나며 떠오르던 그날의 해를 잊지 못한다
멕시코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낼 무렵, 방학을 맞아 부모님이 계신 니카라과에 가기 위해 첫 번째 경유지인 코스타리카에 도착했다. 멕시코에서 니카라과로 비행기를 타고 가면 좋겠지만, 니카라과로 취항하는 항공사가 많이 없어 비행기표가 너무 비쌌다.
하는 수 없지.
마찬가지로 부모님이 니카라과에 계신 다른 친구와 함께 코스타리카 까지는 비행기를 타고 오고, 코스타리카에서 버스를 타고 니카라과까지 육로로 이동하기로 했다. 공항에서 버스터미널까지, 또 버스터미널에서 열몇 시간을 간드락 간드락 버스에 실려가자니 몸은 고되겠지만, 덕분에 한 사람당 50만 원씩은 세이브한다며 서로 뿌듯해했다. 문제는 코스타리카 버스 터미널에 도착해서였다
"네? 표가 없다고요?"
연말이다 보니 가족, 친구, 친척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아 버스표가 없었다.
"표가 있는 날이 있긴 한데... 날짜가 좀..."
"언제든 괜찮아요!"
"12월 31일 밤 11시 40분에 출발해서 1월 1일에 도착하는 버스가 있어"
1월 1일을 버스에서 맞이한다는 점이 좀 그랬지만, 심지어 그날은 탑승객이 많이 없어 맨 앞의 파노라믹 뷰 석에 앉을 수도 있단다. 그 좌석은 앞이 유리로 훤히 뚫려있어 풍경을 감상하며 갈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고, 다리를 뻗을 수 있는 공간도 훨씬 넓어서 평소에는 타기 어렵단다. 자 이쯤 되면 고민할게 더 있겠는가
"네 그걸로 주세요!"
내 고생담들이 여럿 그렇듯, 항상 시작은 좋다, 마치 공포영화들처럼.
밤 11시, 낑낑거리며 캐리어를 끌고 친구와 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짐을 맡기도 버스에 올라 좌석에 앉으니 파노라믹 뷰 유리창 너머로 밤하늘의 별이 빛났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니카라과에 도착하겠지, 잠시 떠들다가 커튼을 치고 우리는 각자 잠이 들었다.
얼마 시간이 지난 것 같지 않은데,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것을 보니 얼마 시간이 지난 것 같지 않은데, 버스도 정차해있었다.
그리고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 옆에서 자고 있던 친구가 없어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양 옆으로 나무가 빼곡한 깜깜한 시골길이었다. 버스가 휴게소에 선 게 아닐까, 친구가 휴게소에 마실 거라도 사러 간 게 아닐까 라는 생각마저 저 멀리 날아갔다. 버스는 왜 시골길 한복판에 섰으며, 내 친구는 어디에 갔으며,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기사와 승무원은 왜 안 보이는 거지?
놀란 새가슴을 부여잡고 버스에 내려앉은 새까만 밤을 헤치고 버스에서 내렸다.
45인승 커다란 버스 뒤로 속닥거리는 사람 소리와 인기척이 들렸다.
가까이 가도 될까?라는 생각보다 내 친구 어디 갔지?라는 생각에 다리가 먼저 움직였다.
버스 뒤편에 세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런데 실루엣 형상이 좀 이상했다. 마주 보고 대화하는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앉아있는 것도 아니고, 선 것도 아니고, 마치 셋이 엉켜있는 것 같은 이상한 실루엣이었다.
더 가까이 가도 될까? 위험한 상황은 아닐까?
내 중남미 전용 위험 경고 사일렌이 머리를 울렸지만 위험한 상황이라면 아마 그에 연루된 것은 내 친구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조금씩 더 가까이 다가갔다.
더 가까이 가니 그 실루엣들 사이로 작은 플래시 라이트가 켜져 있어,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 세 실루엣 중 하나는 버스기사, 다른 하나는 승무원, 그리고 마지막 실루엣은 내 친구였다.
"야 너 여기서 뭐하는데에에!" 빽 소리 지르려던 내 마음과는 달리, 다행이라는 생각에 말꼬리가 늘어졌다.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눈물도 조금 났다. 이 씨, 너 어디 갔나 했잖아, 그것도 이 위험한 중남미 국경 근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