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뉴스나 유머사이트에서 사본 없는 박사논문을 지키기 위해서 무장강도에 저항한 여대생의 이야기를 보신 적 있으신지. 총을 들이대면서 핸드백을 빼앗으려고 했지만 논문을 빼앗길 수 없었던 여대생이 끝까지 핸드백을 놓지 않았더란다. 사본 없는 논문이라니, 그럴 법도 하다. 코스타리카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던 나도 그 일이 마냥 남일 같지는 않았다.
나야 뭐 박사학위 논문처럼 거창한 것을 지키기 위해 그랬던 것도 아니고, 무장강도처럼 위협적인 상황도 아니었지만 그때 일을 생각하면 정말 위험한 일로 이어질 수도 있었겠구나 싶다. 오늘 이야기는 코스타리카에서 소매치기당하고, 그 소매치기를 쫓아가 결국 받아낸 이야기. 내 힘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소매치기범 잡은 이야기.
코스타리카에서 공부하던 때, 그러니까 대학생일 때 있었던 일이다. 교양수업으로 사회와 복지를 듣고 있었는데, 교수님께서 굉장히 난해한 과제를 내주셨다
코스타리카의 사회적 문제 중 하나를 선정하여 그 문제 자체를 나타내면서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에 대한 해결의 방향성을 함께 보여주는 사진을 10장 찍어서 제출하라
그 문제만을 보여주는 사진을 찍어 오라 하면 어려운 과제가 아니지만, 해결방법을 함께 제시하는 사진을 찍어오라니. 너무 난해한 주제였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과제 제출이 채 1주일도 남지 않아서야 나는 주제를 가난으로 정했다.
'가난함 와 부유함을 한 사진에 같이 담고 그 갭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줄 수 있다면 좋겠는데'
'그럼 코스타리카의 사회적 문제로는 가난을 지목하고, 가난한 사람은 계속 가난해지고, 부유한 사람은 계속 부유해지는 부정부패에 있다고 설명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원하는 프레임을 담기 위해서는 부유함과 가난함이 동시에 존재하는 곳으로 가야 했다. 그리고 그런 곳을 찾기 어렵지 않았다. 산호세 센트로. 코스타리카 수도의 중심가 (centro)는 시장과 도소매 가게들이 들어서 있어 굉장히 상업적인 곳이다. 국내외 유명 브랜드들이 입점해 있고, 유명 호텔이 밀집해 외국인들도 한 번쯤은 들르는 부유한 곳이면서도, 그만큼 가난한 사람들이 구걸을 위해 모이는 곳이기도 했다.
중심가 안에서도 부유함과 가난함을 극명하게 볼 수 있으니 내 과제에는 안성맞춤이었다.
De Luis Álvarez - Fotos tomadas por Luis Álvarez, y liberadas por mí con autorización., CC BY-SA 4.0
과제 제출 하루 전 산호세 센트로 (중심가)로 향했다. 유명 브랜드의 화려한 건물 옆 무너지고 더러운 오물이 가득한 오래된 벽도 찍고, 양해를 구하고 화려한 거리의 노숙자분의 신발도 찍었다. 과제는 과제일 뿐이지만, 사진을 찍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아마 이 불편한 마음이야 말로 교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싶어 했던 사회적 부담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10장을 다 채웠다. '이제 집에 가서 간단하게 편집하고 올리기만 하면 돼!'라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니 낯선 곳이었다. 사진에 담을만한 주제를 찾다가 잘 모르는 곳까지 온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별 걱정 없었다. 지도 앱을 켜고 현재 위치를 확인했다.
'어차피 센트로 (중심가)가 큰 것도 아니고 지도만 보면 대충 어딘지 알 수 있겠지'
그때, 내 손에서 휴대폰이 없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날쌘 손놀림에 휴대폰이 내손에서 힘없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들자 저 앞에 내 휴대폰을 들고 뛰어가는 노숙자 아저씨가 보였다.
그 짧은 새에 여러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차피 오래된 휴대폰이었다. 갤럭시 S9이 나온 시점이었는데 그 휴대폰은 S5였으니 아무런 미련 없이 돌아 설 수 있었다. 어차피 이미 휴대폰은 빼앗겼고, 사실 비싼 핸드폰도 아니었으니 황당하기는 하지만 마음이 쓰릴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제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결정은함부로 따라가지 않고 최대한 빨리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었다. 휴대폰이 오래되어 아깝지 않아서가 아니라, 신변과 안전에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괜히 쫓아갔다가 칼침 맞을 수도 있는 일이고, 휴대폰을 미끼로 자기 패거리가 있는 골목으로 유인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이 들었을 때 이미 내 두 다리는 노숙자 아저씨가 뛰어간 방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내 과제!"
찍은 사진이 워낙 마음에 들어 다시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을지 자신도 없었고, 시험이 없는 수업이라 한 과제 과제마다 배당된 점수가 크다는 사실도 한 몫했다. 이 과제를 제출하지 못해 0점을 받으면 그 타격이 컸다. 클라우드에 자동으로 저장이 되는 것도 아니니 복사본도 없고 다시 찍을 시간도 없으니 어떻게든 휴대폰을 돌려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정신없이 뛰고 또 뛰었다.
사람이 너무 당황하면 말도 잘 못한다는 것,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그때의 내가 그랬다. 뭐라고 소리라도 치면 앞에 있던 사람이 듣고 잡아줄 수도 있을 텐데 도무지 뭐라고 말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옆에서 내가 뛰어가는 것을 보고 누군가가 소리 질러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계속 뛰기만 했을 것이다. 우리를 본 어떤 사람이 소리를 질렀다
"agárralo!" (잡아라!)
그제야 나도 막 소리쳤다
"agárralo por favor!" (저 사람 좀 잡아주세요!)
그러나 다들 흘깃흘깃 쳐다보기만 할 뿐 누구도 나서서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다. 앞에 사설 경비원이 있는 것을 보고 저 사람이나 마나 잡아주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헛된 기대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들 혹여라도 있을지 모르는 보복이 두려웠던 것이 아닐까? 괜히 나를 도와줬다가 그 사람이나 그 사람의 패거리가 언제 칼을 쓱 들이댈지 모르는 일 아닌가. 하여튼 나 소성일이는,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그 불운한 상황에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당시 내가 새벽 운동으로 달리기를 하던 때라, 뛰는 것 하나는 자신이 있었다는 것이다. 내 휴대폰을 훔쳐간 노숙인과의 간격이 점점 좁혀지기 시작했다. 내가 잘 뛰는 것도 있었겠지만 아마 잘 못 드시고 잘 못 쉬셔서 뛰기도 힘든 분이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쯤 되자 나도 지치기 시작했다. 다리에 힘이 빠지고 숨이 가쁘고 손에 들고 있던 음료수는 내팽개친 지 오래, 등에 매고 있던 가방도 점점 무겁게 느껴졌다.
그때 노숙인이 옆으로 픽 쓰러졌다
용기 있는 시민 한 분이 몸을 던져 노숙인을 덮친 것이다. 너무 감사한 분이다. 그 과정에서 얼굴을 긁혔는데도 끝까지 노숙인을 놓지 않았다. 노숙인이 버둥거리며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치는데 끝까지 놓지 않고 제압하여 결국 나는 휴대폰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ya deja! ¡aquíe stá su celular! déjame ir!" (놔줘! 여기 휴대폰 주면 될 거 아냐, 가게 해 줘!)
"como puedes hacer eso a alguien como ella?" (아니 어떻게 이런 애한테 이따위 짓을 할 수 있어!)
그분이 보기에도 깡마른 내가 불쌍해 보였는지 어떻게 이런 애한테 이런 못된 짓을 하냐며 훈계까지 하고 나서야 노숙인을 놓아주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 노숙인은 다시 저 멀리 도망쳤고, 나는 과제를 무사히 돌려받았다. 그제야 감정이 몰려오며 눈물이 났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코스타리카까지 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지, 너무 서러웠다. 사실 나는 너무 무서웠고, 겁났고, 두려웠고, 화가 났다. 다치면서까지 나를 도와준 그 사람에게 너무 미안했고, 또 너무 고마웠다. 이 모든 감정이 한 번에 폭발하자 길거리에 철퍼덕 앉아 목놓아 엉엉 울었다. 사람들이 한두 명씩 가까이 다가와 코스타리카 수도 중심가에서 혼자 울고 있는 작은 동양인 하나를 구경했다. 사람들이 몰리자 그제야 경찰도 몇 명 다가와 무슨 일이냐고 묻고, 그 사람의 인상착의를 적어갔다. 그때까지도 나는 엉엉 울었다.
그중 몇 명이 나한테 와서 말을 걸었다
"¿estas bien? ¡Eres muy valiente! ¿quieres que te ayude?"
(괜찮아요? 정말 용감했어요! 도움이 필요한가요?)
이미 너무 놀란 나는 혹시 내가 정신없는 틈을 타서 가방을 빼앗아가거나, 다른 해를 끼치려는 것은 아닌지 싶어 흠칫 놀라 뒤 걸음질 쳤다. 모르는 곳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가까이 다가오자 본능적인 두려움에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들은 괜찮다는 제스처를 하며 아까 도와준 사람의 친척들이라고 걱정하지 말라며 다독여주었다. 알고 보니 그 사람들은 그 앞 가게 주인의 가족들이었고, 가게 주인의 생일이라 다 같이 모여 생일파티를 하던 중에 내가 소리 지르는 것을 듣고 나와있었던 것이다.
"está bien. Ya paso. quiere llamar a tus familias?" (괜찮아요, 다 지나갔어요. 가족 부를래요?)
"yo no tengo familia aquí, yo soy solita" (저 여기에 가족 없어요. 저 혼자예요)
그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가게로 데려가 의자를 내와 앉혀주고, 진정하라며 물도 가져다주고, 휴지를 가져와 눈물을 닦아주었다. 심지어 생일파티에서 먹던 케이크도 한 조각 잘라와 먹으라며 접시를 밀어주었다. 그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고마움을 고맙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음이 아쉬웠다.
"con mucho gusto, si quieres ahorita te llevamos a tu casa" (별말씀을요, 집에 데려다 줄게요)
"no, estoy bien. sabes dónde puedo tomar un bus?" (아니요 괜찮아요, 혹시 버스 정류장은 어디인가요?)
"ok, entonces te llevamos a la parada de bus" (그래요 그럼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 줄게요)
고마운 사람들이 버스정류장에 데려다주고 나서 우리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 활주극 중 언제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꺼졌었던 휴대폰 전원을 켰다. 니카라과에서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에게서 카톡이 하나 와있었다.
"오랜만이야, 요새 뭐해?"
글쎄,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까
나? 뭐하냐고? '어... 방금 소매치기범 잡았어. 솔직히 말하면 내가 잡은 건 아니고, 나는 쫓아가기만 했고 고마운 분들이 도와주셨어'라고 말하면 되나? 울컥했지만 다시 눈물을 삼켰다.
004. 코스타리카에서 모닝으로 산 넘기 에피소드를 읽은 내 친구가 그랬다. 살아있기 때문에 추억이라고. 이번 에피소드도 별반 다르지 않다. 살아있기 때문에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께 내 추억으로 들려드릴 수 있었다. 죽었으면 뉴스에서 내 사망사유로 소개되었겠지.
'코스타리카 거주 한인 교민 ㅇㅇㅇ씨, 소매치기 쫓다 사망...'
뭐 중요한 것은 그때 고마운 분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고, 그래서 나는 이렇게 살아서 글을 쓰고 있다는 것, 가족에게 데리러 오라고 전화하라는 말에, 가족이 코스타리카에 없고, 혼자라고 대답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 사람들이 내 자매고 형제이지 않았는지 생각해본다. 혼자라고 대답했지만 그 말에 모순이 있다. 그때 그곳에 그 사람들이 있어주었으니까. 중남미 치안은 어떻냐고, 어떤 사람들이냐고 묻는 말에 나는 일단 조심해야 할 점을 잔뜩 늘어놓은 다음에 이렇게 대답한다. 어디든 나쁜 사람들도 있고 좋은 사람들도 있다고. 그런데 좋은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