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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시장

by 윤늘




태양은 뜨겁게 아스팔트를 녹이고, 불친절한 여름은 살랑이는 바람조차 사치라듯이 조금의 움직임도 없는 뜨거운 공기로 사람을 태웠다. 사차선 도로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짧은 5분 동안에도 등에서 땀방울이 주르륵 흘렀다. 신호등 앞에 서 있는 대여섯 명의 사람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태양이 주는 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악했다. 어떤 이는 작은 손풍기로 뜨거운 바람을 만들어내고, 어떤 이는 태양을 가리는 깊은 선캡을 썼다. 아주머니들은 알록달록 꽃이 그려져 있는 양산을 쓰고,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가며 투덜거렸다. 나만 아무것도 없이 정수리로 꽂히는 태양의 뜨거움을 받아내고, 뜨거운 공기를 들이마셨다. 폐 속까지 뜨거워지는 느낌에 몸 안의 장기들도 익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이상한 생각을 하며 신호등이 바뀌기만을 기도했다. 뜨거움은 더 진해지고, 횡단보도의 하얀 페인트가 녹아가는 듯 아지랑이가 일렁였다. 처음 등에 흐르던 땀방울이 이마에도, 콧잔등에도 흘러내렸다. 꽃무늬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는 아주머니들은 역시 삶의 지혜가 있는 것인지, 아직 반오십인 나와는 다른 연륜이 느껴졌다. 하필이면 회색 반팔티를 입고 나왔을까. 겨드랑이에서도 슬금슬금 땀이 흐르는 것 같다. 젠장.


신호가 바뀌고, 옆에 세워두었던 바퀴 두 개 달린 작은 구르마를 챙겼다. 그새 쇠로 된 손잡이가 데워졌는지 뜨거웠지만 어쩔 수 없다. 반면 아주머니들의 구르마 손잡이는 알록달록한 땀 닦던 손수건이 감겨 있었다.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며 신호등을 건너고 울퉁불퉁한 벽돌 인도를 걸어갔다. 신호등을 건넌 사람들 일부는 왼쪽으로, 일부는 오른쪽으로 흩어졌다. 나와 세 명의 아주머니들만 구르마를 끌고 같은 목적지로 향했다. 개구리시장 입구에 도착하자 시끌벅적한 소리와 북적거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토요일 오후 4시 시장의 광경은 각오했던 마음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엄마와 왔을 때는 앞장서 가는 엄마의 뒷꽁무니만 강아지마냥 쫓아다니기만 했는데, 혼자 이곳에 도착하니 한숨이 나왔다.


바깥도 아닌, 안도 아닌 이곳은 플라스틱 지붕으로 햇빛만 가렸지만 태양이 내려앉던 인도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체감 온도가 5도 이상 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정말로 5도가 떨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숨이 쉬어졌다. 함께 입구까지 왔던 아주머니들은 인파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인데, 나는 입구 앞에서 길 잃은 똥강아지처럼 멍하게 시장 안을 바라볼 뿐이다. 시끄러운 소리, 몸을 부딪히며 지나가는 사람들… 정신을 잃을 것 같다. 시큰하고 알싸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니다, 뇌를 찔렀다고 해야겠다. 익숙한 냄새, 김치찌개다. 분명 김치찌개 냄새다. 뇌에서는 그 냄새를 따라가라고 지시를 내렸다. 지옥 같은 길을 걸어오며 바짝 말랐던 입 안에 침이 고이고, 흐릿했던 시야도 밝아졌다. 정확히 내가 가야 할 곳이 정해졌다. 걸음을 떼기 전, 인파 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마지막 각오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지나가요.”


숨을 들이마시는 그 순간, 어떤 남자가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스치듯 닿은 순간에도 느껴진 끈적함에 짜증이 올라와 그를 찾았다. 어깨를 치고 지나간 남자의 티셔츠 등은 흠뻑 젖어 있었고, 어깨엔 흰 수건을 둘렀다. 그는 양손에 10리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물통을 들고 빠른 발걸음으로 움직였다.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분명 무섭게 생긴 아저씨일 것이다. 그는 사람들 사이를 요리조리 빠르게 헤치고 나아갔고,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졌다. 김치찌개를 사러 가야겠다는 생각보다도 왠지 수박이 더 먹고 싶어졌다.


결국 광수네 과일가게 앞에 도착했다. 커다란 수박이 2열 3행으로 가지런히 놓여 있다. 가격은 2만 원. 비싸다. 작년엔 분명 1만 5천 원이었던 것 같은데… 물가가 오른 건지, 수박값만 오른 건지 2만 원이라니. 그것도 가장 작아 보이는 수박이 2만 원이고, 크고 맛있어 보이는 수박은 2만 8천 원이다. 고민된다. 2만 원이면 치킨도 가능하고, 김치찌개는 3인분도 어쩌면 가능할 것이다. 수박이 작다지만 혼자 먹기에는 결코 작지 않다. 혼자 먹으려면 족히 일주일은 걸릴 것이고, 이걸 들고 옮기는 것도 일이다. 아무리 구르마가 있다지만 안 되겠다. 다음에 사야겠다.


“아가씨, 수박 줘?”


광수네 과일가게인데 광수가 여자일 리는 없지만, 가게 안에 있던 아주머니가 나와 말을 건넸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들어가는 아주머니를 힐끔 보니, 아주머니 앞엔 힘겹게 돌아가는 오래된 선풍기가 쐐앵쐐앵 소리를 내며 돌고 있었다.


먹을 게 없어서 시장에 오긴 했지만 마트에 갈 걸 그랬다. 이 더위에 무슨 자신감으로 북적이는 시장통에 들어왔을까. 이름도 하필 개구리시장이다. 사람들의 까만 머리통이 개구리 알처럼 다닥다닥 붙어 움직이는 게 징그러워지려 한다. 엄마 따라 시장에 올 때는 구경할 것도 많고, 맛있는 것도 온 천지에 널려 있던 것 같은데 혼자 오니 맛있어 보이는 것이 하나도 없다. 시장 안쪽에 마트가 있던 것 같은데 그곳을 가야겠다. 뭐라도 사야 억울하지 않을 것 같으니까.


개구리마트 입구부터 시원한 바람이 느껴졌다. 사람들에게 치여 시장을 가로질러 들어오는 동안 땀이 흘렀던 것인지, 시원한 바람이 닿자 차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저 안에는 천국이 존재함이 분명했다. 자동문을 열고 마트 안으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가자, 바깥에서 느꼈던 시원함은 아기 시원함이었다. 마치 “진짜 시원함은 이런 것”이라며 어른의 시원함을 보여주 듯, 10배는 차가운 바람이 온몸을 감쌌다. 정수리 머리카락 끝부터 새끼발가락 끝까지 짜릿하게 시원함이 퍼졌다. 방금 전까지 바깥에서 먹고 싶은 게 없던 사람은 사라지고, 보이는 것마다 맛있어 보이는 효과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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